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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

도 서

화 첩

기 타

머리글

제1권

제1장 비운이 드리운 나라
(1912.4-1926.6)

1. 우리 가정

2. 아버지와 조선국민회

3. 독립만세의 메아리

4. 타향에서 타향으로

5. 《압록강의 노래》

6. 나의 어머니

7. 유산

제2장 잊을수 없는 화전
(1926.7-1926.12)

제3장 길림시절
(1927.1-1930.5)

제2권

제3권

제4권

제5권

제6권

제7권

제8권

처음|이전| 6/159 |다음|마지막



5. 《압록강의 노래》

1923년초에 아버지는 나를 불러앉히고 이제는 소학교를 졸업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장차 어떻게 할 생각인가고 물었다.

나는 상급학교에 가서 공부를 더하고싶다고 말씀드리였다. 나를 상급학교에 보내려는것은 우리 부모님들이 평소부터 품어온 소망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장래에 대한 포부를 물으니 나로서는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심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제부터는 조선에 나가서 공부하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였다.

그 말씀 역시 나한테는 뜻밖이였다. 조선에 나가서 공부하려면 부모님의 슬하를 떠나야 했다. 나는 그런 경우를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옆에서 바느질을 하던 어머니가 놀라면서 아직 나이도 어린데 어데 가까운 고장에 보내면 안되겠는가고 물었다.

아버지는 이미 결심이 확고히 서있는것 같았다. 지금 당장은 섭섭하고 허전하더라도 성주를 기어이 조선에 내보내야겠다고 거듭 말씀하였다. 원래 우리 아버지는 한번 내놓은 말을 리유없이 거두는 법이 없었다.

네가 어려서부터 부모들을 따라다니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였다, 이제 다시 조선에 나가면 그보다 더 큰 고생도 할수 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너를 조선에 내보내자고 결심하였다, 조선에서 태여난 남아라면 마땅히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 네가 조선에 나가서 우리 나라가 왜 망했는가 하는것만 똑똑히 알아도 그것은 큰 소득이다, 고향에 나가서 우리 인민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고있는가 하는걸 체험해보아라, 그러면 네가 할바를 잘 알게 될것이다.

아버지는 이런 내용의 말씀을 진지하게 하였다.

나는 아버지의 뜻대로 조선에 나가서 공부하겠다고 말씀드리였다. 당시로 말하면 조선에서도 돈냥이나 있는 집 자식들은 저마다 보따리를 싸들고 외국류학의 길에 오르던 때였다. 미국이나 일본 같은데 가야 개명도 하고 학문도 닦을수 있다고 생각하는것이 하나의 시대적풍조로 되여있었다. 그러니 모두가 외국행을 할 때 나는 조선행을 하게 되였다.

아버지의 사고방식이 아주 독특하였다. 나는 지금에 와서도 그때 아버지가 나를 조선에 내보내준것이 옳은 처사였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 아버지가 열두살도 되지 않는 자식을 당시는 무인지경이나 다름없었던 천리길에 홀로 내세운것을 보면 보통성미가 아니였다. 그 성미가 오히려 나에게는 힘으로 되고 믿음으로 되였다.

사실 그때의 솔직한 심정은 그렇게 단순한것이 아니였다. 조국에 나가서 공부하라니 다른것은 다 좋았는데 부모동생들의 곁을 떨어지는것이 싫었다. 그렇지만 고향에 가고싶은 생각은 불같았다.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단란한 가정의 분위기를 떠나고싶지 않은 미련이 검질기게 교차되는 복잡한 심리의 파동속에서 나는 들뜬 기분으로 며칠을 보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날씨라도 좀 따스해진 다음에 보내면 어떻겠는가고 말씀하였다. 아직 어린 자식을 천리길에 홀몸으로 내세우자니 어머니로서 걱정이 되지 않을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 말씀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천리길을 가야 할 내 앞길을 은근히 걱정하면서도 아버지가 계획한 날자에 나를 떠나보내려고 밤을 새우며 두루마기와 버선을 지었다. 아버지가 일단 결심한 문제였으므로 어머니도 다른 말씀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 어머니의 특징이기도 하였다.

떠나갈 날이 다되자 아버지는 나에게 팔도구에서 만경대가 천리인데 혼자서 갈수 있는가고 물었다. 나는 갈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내 목책에 로정도를 그려주었다. 후창에서 아무데, 화평에서 아무데, 어데 어데까지 그리고 그 어간이 몇리라는것도 써주고 전보는 두번 치되 한번은 강계에서 치고 한번은 평양에서 치라는것까지 상세히 알려주었다.

내가 팔도구를 떠나던 날은 음력 정월 그믐날(양력 3월 16일)이였다. 아침부터 눈보라가 일고 바람이 사납게 불었다. 그날 팔도구에 사는 동무들이 나를 바래주느라고 압록강을 건너 후창남쪽까지 30리를 따라왔다. 길동무를 해준다고 하면서 한정없이 그냥 따라오기에 겨우 설복해서 돌려보냈다.

막상 길을 떠나고보니 여러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가야 할 천리중 500리이상은 무인지경이나 다름없는 험산준령이였다. 그 험한 산악들을 단신으로 넘는다는것이 헐치 않았다. 후창에서부터 강계에 이르는 길 량옆의 수림들에서는 대낮에도 맹수들이 어슬렁거리였다.

그때 천리길을 걸으면서 고생을 퍼그나 했다. 직고개나 개고개(명문고개)와 같은 고개를 넘을 때는 정말 혼이 났다. 오가산령은 하루종일 넘었다. 아무리 걸어도 고개가 끝이 나지 않고 새 고개가 연방 나타나군 하였다.

오가산령을 넘고나니 발이 다 부르텄다. 다행히도 그 령밑에서 어떤 로인이 나를 붙들고앉아 발바닥에 성냥으로 딱총을 놔주었다.

월탄을 거쳐 오가산을 넘은 다음에는 화평, 흑수, 강계, 성간, 전천, 고인, 청운, 희천, 향산, 구장을 지나 개천에 이르러 거기서 기차를 타고 만경대로 나왔다.

개천에서부터 신안주까지는 협궤철도가 놓여있었는데 《니끼샤》라는 자그마한 영국제기관차가 끄는 경편렬차가 다니였다. 신안주에서 평양까지는 지금과 같은 광궤철도가 부설되여있었다. 그 당시 개천에서 평양까지의 차표값이 1원 90전이였다.

나는 그때 천리길을 걸으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한번은 발이 너무 아파서 어떤 농민의 발구를 얻어탄 일이 있었다. 헤여질 때 값을 치르려고 돈을 내놓으니 농민은 받지 않고 오히려 그 돈으로 나에게 엿을 사주는것이였다.

제일 잊혀지지 않는 사람은 강계객주집 주인이다.

저녁늦게 강계시내에 도착하여 객주집에 들어갔더니 그가 대문밖까지 나와서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는것이였다. 하이칼라를 하고 조선바지저고리를 입은 키가 자그마한 사람이였는데 아주 사근사근하고 붙임성이 좋았다. 그가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가 친 전보를 받고 나를 기다리고있었다는것이였다.

우리 아버지를 《김선생》, 《김선생》하면서 존경해온 이 객주집의 할머니도 나를 보자 4년전에 아버지를 따라 중강으로 들어갈 때는 조그마했는데 이렇게 컸구나 하면서 친손자라도 만난것처럼 기뻐하였다. 할머니는 미리 준비해놓은 소갈비국도 끓이고 청어도 구워서 자기 집 아이들한테는 하나도 먹이지 않고 나한테만 주었다. 밤에는 새로 꾸민 이불도 내놓았다. 주인들이 그때 정말 나를 위해 있는 성의를 다했다.

나는 다음날 아침 강계우편국에 가서 아버지가 일러준대로 팔도구에 있는 부모님들에게 전보를 쳤다. 전보문 한자에 3전이였는데 여섯자가 넘으면 1전씩 더 받는다고 하여 전보용지에 《강계무사도착》이라는 여섯글자를 써넣었다.

이튿날 객주집주인은 나를 차에 태워보내려고 자동차사업소에 갔다왔다. 그는 차고장으로 열흘쯤 기다려야 할것 같다면서 신청은 해놓았으니 친척집에 온셈치고 그동안 자기 집에서 묵으라고 하였다. 나는 그의 진정이 고마왔지만 빨리 가야겠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도 더는 만류하지 못하고 짚신 두컬레를 주면서 개고개쪽으로 가는 달구지군까지 한사람 물색하여 붙여주는것이였다.

개천역앞에 있던 서선려관 주인도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였다.

나는 그 려관에 들자 15전짜리 밥을 청하였다. 려관밥도 등급이 있었는데 이 려관에서는 15전짜리가 제일 눅거리였다. 주인은 그것을 상관하지 않고 나에게 50전짜리 밥을 주었다. 내가 돈이 없어서 50전짜리는 못먹겠다고 했더니 주인은 돈이 없어도 그냥 먹으라고 하였다.

밤이 되자 려관에서는 손님들에게 포단과 모포 두장씩을 내주고 50전정도 받았다. 수중에 있는 로비를 계산해보니 모포를 두장씩이나 덮고 호강할 형편이 못되였다. 그래서 나는 모포를 한장만 달라고 하였다. 주인은 이번에도 다른 손님들이 다 포단을 깔고 모포를 두장씩 덮고 자는데 너 혼자만 어떻게 그렇게 하겠는가, 돈을 안내도 되니 마음놓고 받으라고 하였다.

조선사람들이 비록 나라를 빼앗기고 망국노가 되여 어렵게 살았지만 조상전래의 인정과 미풍량속만은 깨끗하게 간직하고있었다. 금세기초까지만 하여도 우리 나라에는 무전려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기 집이나 마을에 찾아오는 나그네들이 돈을 내지 않아도 밥을 먹여주고 잠을 재워주는것이 조선의 풍속이였다. 이런 풍속에 대해서는 서양사람들도 몹시 부러워하였다. 나는 천리길을 걸으면서 조선민족이 참으로 선량하고 도덕적인 민족이라는것을 깊이 깨닫게 되였다.

서선려관 주인도 강계객주집 주인이나 중강려인숙 주인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지도와 영향을 받은 사람이였다. 여덟살적에 중강으로 들어갈 때에도 느낀바이지만 아버지한테는 이처럼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친지들이 어디에 가나 있었다.

나는 우리 일가를 친혈육처럼 맞이하고 보살펴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버지가 저 많은 친구들을 언제 다 사귀였을가, 저런 동지들을 얻느라고 걸음인들 얼마나 많이 걸었을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사방에 친구들이 있으니 객지에 나서도 아버지는 이모저모로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나도 그들의 덕을 단단히 보았다.

천리길을 걸을 때의 인상가운데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4년전까지 등잔불을 켜고 살던 강계시내에 전등불이 환한것이였다. 강계사람들은 전기가 들어왔다고 좋아하였지만 나는 왜색이 짙어가는 거리풍경을 보고 쓸쓸한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조국에 나를 내보내면서 조선을 알아야 한다고 절절하게 말씀한 아버지의 참뜻이 마음속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였다. 나는 그 뜻을 되새기면서 비운에 잠긴 조국의 모습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 천리길이 조국을 알게 하고 우리 인민을 알게 해준 하나의 큰 학교였다.

팔도구를 떠난지 열나흘만인 1923년 3월 29일 해질무렵에 나는 마침내 고향집뜨락에 들어섰다.

아래방에서 물레질을 하던 할머니가 버선발로 마당에 뛰여나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구하고 함께 왔니?》

《무얼 타고 왔느냐?》

《아버지, 어머니는 다 잘 있느냐?》

할머니는 나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한꺼번에 많은것을 물었다.

방에서 멍석을 틀던 할아버지도 밖으로 뛰여나왔다.

할머니는 혼자서 걸어왔다는 나의 대답이 잘 믿어지지 않는지 《아니, 네가 정말 혼자서 왔단말이냐! 너의 아버지가 범보다 더한 사람이구나!》 하고 혀를 찼다.

그날은 온 집안이 모여앉아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루밤을 새웠다.

산천은 예나 다름없이 유정하고 아름다왔건만 마을의 구석구석에서 내비치고있는 가난의 자취는 이전보다 더 두드러져보이였다.

나는 만경대에 며칠간 머물러있다가 외할아버지가 교감으로 계시는 창덕학교 5학년에 편입되여 조국에서의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때부터는 칠골외가에 가있으면서 학교를 다니였다.

당시의 외가는 사실 내가 얹혀살 형편이 못되였다. 외가에서는 그때 강진석외삼촌의 일로 시련을 겪고있었다. 외삼촌이 잡혀서 감옥살이를 시작한 후부터 경찰들의 감시와 성화가 심해진데다가 옥중에 있는 외삼촌의 건강이 좋지 않아 온 일가가 몹시 상심하고있었다. 외가의 살림살이 역시 타개죽이나 비지밥으로 그날그날을 겨우 연명해가는 형편이였다. 둘째외삼촌은 농사를 짓는것만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수가 없어 우차몰이까지 하면서 가까스로 생활고를 헤쳐나갔다.

그러나 외가에서는 내앞에서 가난티를 조금도 내지 않고 내가 학습에 열중할수 있도록 뒤받침을 잘해주었다. 나를 위해 안채의 웃방을 따로 내주고 거기에 남포등도 걸어주고 돗자리까지 깔아주었다. 내 동무들이 셋씩넷씩 무리를 지어 때없이 찾아들어도 탓하지 않았다.

창덕학교는 우리 외할아버지를 비롯한 칠골일대의 선각자들이 애국문화계몽운동의 조류를 타고 국권회복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세운 경향성이 좋은 사립학교였다.

구한국말기와 《한일합병》후 우리 나라에서는 구국투쟁의 일환으로 애국적인 교육운동이 맹렬하게 전개되였다. 국권상실의 수치스러운 본원이 나라의 후진성에 있다는것을 눈물겹게 통감한 선각자들과 애국지사들은 교육이야말로 자강의 기초이고 근본이며 교육을 발달시키지 않고서는 나라의 독립도 사회의 근대화도 실현할수 없다는것을 절실히 깨닫고 도처에서 사립학교운동을 벌리였다.

이 운동의 앞장에는 안창호, 리동휘, 리승훈, 리상재, 유길준, 남궁억과 같은 애국적인 계몽운동자들이 서있었다. 각 지방에 조직되여있는 학회들도 교육운동을 힘있게 추진시키였다.

온 나라를 휩쓸고있던 교육문화운동의 열풍속에서 수천개의 사립학교들이 태여나 봉건의 구속에서 잠들고있던 이 나라의 지성에 불을 달아주었다. 공자, 맹자의 교리를 가르치던 서당들이 신식학문을 배워주는 학당이나 의숙으로 개편되여 후대들에게 애국의 정신으로 분발하라고 부르짖은것도 이무렵이였다.

민족주의운동의 지도자들은 례외없이 교육을 독립운동의 시발점으로 삼고 거기에 온갖 재력과 심혈을 다 기울이였다. 테로를 독립운동의 기본방책으로 틀어쥐고 리봉창,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어마어마한 사건들을 배후에서 끊임없이 조종해온 김구도 초기에는 황해도일대에서 교육활동에 종사하였다. 안중근도 남포지방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후대들을 가르친 선비였다.

서선지방에 설립된 사립학교들가운데서 유명한것은 안창호가 주관한 평양의 대성학교와 리승훈의 개인자금으로 세워진 정주의 오산학교였다. 이 학교들에서는 이름난 독립운동자들과 지식인들이 많이 배출되였다.

외할아버지는 창덕학교에서 안중근과 같은 인물이 한명만 나와도 영광이라고 하면서 나더러 공부를 열심히 하여 훌륭한 애국자가 되라고 하였다.

나는 안중근과 같은 유명한 렬사는 못돼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애국자가 되겠다고 대답하였다.

창덕학교는 서선지방의 사립학교들가운데서도 비교적 규모가 크고 현대화된 학교로서 학생수가 200명이상 되였다. 당시로서는 작은 학교가 아니였다. 학교가 하나 있으면 그것을 거점으로 주변인민들을 빨리 계몽시킬수 있었다. 그러므로 평양지방의 인민들과 유지들은 창덕학교를 매우 중시하였고 여러모로 이 학교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백선행도 창덕학교에 거액의 자금을 희사하였다. 본명보다도 백과부라고 많이 불리운 그는 해방전에 평양에서 자선사업으로 이름이 높던 녀자이다. 스무살전에 과부가 된 그는 80고령이 될 때까지 수절하면서 한푼두푼 돈을 모아 부자가 되였다. 치부방법이 아주 대담하고 독특하여 일찍부터 사람들의 화제거리가 되였다. 오늘날의 승호리세멘트공장소속의 석회석광산부지도 한때는 백선행의 땅이였다고 한다. 그가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돌박산을 헐값으로 사두었다가 일본자본가들에게 본전의 몇십배가 되는 비싼 값으로 팔아넘긴것이 바로 오늘의 승호리세멘트공장에 속해있는 석회석광산부지라고 한다.

문서장 한장으로 국토를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팔아넘긴 역신들에 대한 원성이 구천에 사무칠 때 수판알도 튀길줄 모르는 평범한 녀성이 장사속이 밝은 일본자본가들과의 거래에서 막대한 폭리를 얻어냈기때문에 사람들은 그 소문을 일종의 전승무훈담처럼 통쾌하게 들었다.

사람들이 백선행을 존경한것은 그가 사회를 위해 유익한 일을 많이 하였기때문이다. 수중에 돈이 많았지만 그는 부귀영화를 조금도 탐내지 않고 조반석죽의 수수한 생활을 하면서 자기가 평생을 두고 저축해온 그 돈을 사회를 위해 아낌없이 바치였다. 그 돈으로 다리도 놓고 공회당도 지었다. 백선행이 지은 평양공회당건물이 지금도 련광정앞에 원상그대로 남아있다.

공부를 시작한지 며칠 안되는 어느날 외할아버지는 내가 볼 5학년 교과서들을 가지고 왔다. 나는 한보따리나 되는 책들을 받아안고 가슴을 울렁거리며 그 교과서들을 하나하나 펼쳐보았다. 그런데 《국어독본》이라는 교과서를 뒤적거리다가 그만 기분을 잡쳐버리고말았다. 그 책은 《국어독본》이라고 쓴 일본말책이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 민족을 《황민화》하기 위하여 일본말사용을 강요하였다. 강점 첫 시기에 벌써 그들은 관공서와 재판소, 학교들에서 쓰는 공용어는 일본어로 한다는것을 선포하고 조선말을 못쓰게 하였다.

나는 외할아버지에게 일본말책을 왜 국어책이라고 하는가고 물었다.

외할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한숨만 쉬였다.

나는 손칼로 《국어독본》이라는 글자들가운데서 나라국자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날일자를 써넣었다. 《국어독본》이 순식간에 《일어독본》으로 되여버렸다. 일본의 동화정책에 엇서고싶은 저항심리가 나로 하여금 그런 용단을 내리게 하였다.

창덕학교에 며칠간 다녀보니 교실이나 길거리나 놀이터에서 일본말을 하는 아이들이 더러 보이였다. 어떤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에게 일본말을 배워주기까지 하였다.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탓하는 아이들이 별로 없었다. 나라가 망해버렸으니 조선말도 영영 없어지는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였다.

나는 일본말을 익히느라고 애쓰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조선사람은 응당 조선말을 해야 한다고 깨우쳐주었다.

내가 팔도구에서 조국에 나와 칠골에 간 그날 동리사람들은 시국이야기를 들으려고 우리 외가집에 모여왔다가 만주에서 몇해동안 살았으면 중국말을 잘하겠는데 한번 들어보자고 나에게 청을 하였다. 창덕학교 아이들도 중국말을 배워달라고 자꾸 성화를 먹이였다. 그러나 나는 좋은 제 나라 말이 있는데 무엇때문에 남의 나라 말을 하겠는가고 하면서 그들의 요구를 매번 거절하군 하였다.

내가 조국에 나와서 중국말을 해본것은 단 한번뿐이였다.

하루는 둘째외삼촌이 나더러 성안구경을 가자고 하였다. 일에 몰려서 좀처럼 구경이라고는 다니지 않는분이였지만 그날은 나를 위해 모처럼 통시간을 냈다. 네가 오래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오늘은 나하고 같이 나가 점심이나 한끼 먹자고 하며 나를 데리고 평양성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시내를 한바퀴 돌고나서 점심을 먹으려고 서평양에 있는 중국료리점에 들리였다. 지금의 봉화산려관이 자리잡고있는 일대에는 그 당시 중국료리점들이 많았다.

료리점주인들은 매상고를 올리려고 문밖에까지 나와 《어서 오시오.》, 《어서 오시오.》 하면서 친절하게 손님들을 맞아들이였다. 그들은 돈을 벌려고 경쟁적으로 손님들을 끌었다.

우리가 들어간 료리점주인은 서투른 조선말로 무슨 음식을 잡숫겠는가고 물었다.

나는 주인이 알아듣기 쉽게 중국말로 호떡을 두그릇 달라고 하였다.

주인은 눈이 둥그래서 나를 쳐다보더니 혹시 중국학생이 아닌가고 물었다.

나는 중국학생은 아닌데 몇해동안 만주에 가서 산 덕으로 그럭저럭 중국말을 좀 한다고 하면서 중어로 얼마간 대화를 하였다.

료리점주인은 어쩌면 어린 나이에 중국말에 그처럼 능통한가고 하면서 몹시 반가와하였다. 만주에서 살다가 온 학생을 만나니 조국생각이 난다고 하면서 눈물까지 지었다.

그리고는 호떡과 함께 청하지도 않은 음식까지 식탁에 차려놓고 많이 들라고 하였다. 우리는 사양하다못해 주인이 차려놓은 음식을 다 먹었다. 식사를 끝낸 다음 음식값을 치르려고 돈을 내놓았더니 주인은 호떡값조차 받지 않았다.

외삼촌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오늘은 내가 한턱 내려고 너를 성안으로 데리고 갔는데 도리여 네 덕을 입었구나 하면서 크게 웃었다. 이 소문이 외삼촌을 통해 동네에 퍼졌다.

나는 희망대로 강량욱선생이 담임한 학급에 편입되였다.

내가 칠골에 간것은 강량욱선생이 숭실학교를 중퇴하고 창덕학교에 취직한지 얼마 안되는 때였다. 선생은 학비를 댈수 없어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하면서 못내 아쉬워하였다.

가난이 오죽 심했으면 선생의 부인(송석정)이 시집을 버리고 한동안 친정에 가있었겠는가. 부인의 부모들이 네가 인덕이 모자라 조강지처는 되지 못할지언정 가난에 진저리가 나서 지아비를 버리다니 그게 될말이냐, 조선사람치고 그만큼 가난하지 않은 집이 몇집이나 된다더냐, 그래, 시집을 가면 금방석에 앉아서 꿀물에 옥밥이라도 말아먹을줄 알았더냐, 일언이페지하고 당장 돌아가서 사죄하라고 엄하게 질책하여 부인을 시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하니 강량욱선생의 가세가 어느 정도였는가가 긴 설명이 없이도 짐작이 가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선생의 부인을 《숙천아지미》라고 불렀다. 부인의 고향이 평안남도 숙천이였다. 내가 가면 《숙천아지미》는 매번 비지밥을 해주군 하였다. 그 비지밥이 참으로 별맛이였다.

해방직후 나는 강량욱선생의 생일을 축하하러 갔다가 부인과 함께 창덕학교시절의 비지밥을 회상한적이 있었다.

《사모님, 나는 지금도 칠골에서 사모님이 해주시던 비지밥 생각을 가끔 합니다. 그때 그 밥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릅니다. 20여년동안 타향살이를 하느라고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는데 오늘은 그 인사를 받아주십시오.》

내가 이렇게 말하자 부인은 《가난때문에 쌀밥 한끼 변변히 대접 못하고 비지밥만 해드렸는데 감사하다고만 하시니 도리여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비지밥이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였다. 그리고는 창덕학교시절에 장군님대접을 소홀히 한 봉창을 해드린다고 하면서 손수 지은 음식들을 차려주었다.

어느해인가 그 부인이 내 생일을 축하한다면서 《백화주》라는 자작술까지 보내주었다. 《백화주》란 백가지 꽃으로 만든 술이라는 뜻이다.

그 운치있는 이름때문에 류다른 호기심을 느끼면서도 나는 가볍게 잔을 들지 못하였다. 쌀밥 한끼 제대로 먹어보지 못하고 늘 시장기와 싸우던 부인의 지난날이 눈앞에 삼삼해서 좀처럼 잔을 들어올릴수가 없었다.

나라없는 민족의 슬픔을 뼈에 사무치도록 체험한 나에게는 고향에 있는 한대의 나무, 한포기의 풀, 한이삭의 곡식이 이전보다 몇갑절 더 소중해보였다. 그런데다가 강량욱선생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부단히 고취하였으므로 나는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일상적으로 애국적인 영향을 많이 받게 되였다. 그때 선생은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기 위하여 원족이나 수학려행 같은것을 많이 조직해주었다.

그때 있은 여러가지 일들중에서도 황해도 정방산수학려행이 매우 인상깊다.

해방후 강량욱선생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과 공화국부주석으로 일하면서 나와 사업상 접촉할 기회가 많았는데 우리는 창덕학교시절의 수학려행에 대하여, 우리가 본 정방산의 성불사와 남문루에 대하여 감회깊이 회상하군 하였다.

창덕학교시절의 추억가운데서 또 하나 잊혀지지 않는것은 강량욱선생의 창가수업이다. 창가시간은 우리가 제일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는 인기시간의 하나였다.

선생은 전문가들을 무색케 할만 한 희한한 고음성대를 가지고있었다. 그런 성대를 가지고 선생이 《전진가》나 《소년애국가》와 같은 노래를 부를 때면 온 교실이 숨을 죽이고 그 노래를 감상하군 하였다.

돌이켜보면 선생이 배워준 창가의 선률들이 우리의 가슴에 애국적인 정서를 많이 부어주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후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도 창덕학교시절에 배운 노래를 종종 부르군 하였다. 그 시절에 배운 노래들은 지금도 가사와 선률이 그대로 고스란히 머리속에 남아있다.

조국에 돌아와보니 고향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어렵게 살고있었다.

해마다 봄씨붙임이 시작되면 극빈한 가정의 아이들은 학교에 나오지 못하였다. 농사일이 바쁜데다가 농량이 떨어져 물구지, 냉이, 메싹 같은것을 캐여 끼니보탬을 해야 했다. 장날이면 나물을 팔아 식량을 사려고 시내에 나가는 아이들도 있었고 부모들을 도와 집에서 어린 동생들을 봐주는 아이들도 있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점심밥을 싸도 조나 수수, 피로 지은 밥을 싸가지고 다니였다. 그나마도 없어서 점심을 못 싸가지고 오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칠골이나 만경대에는 집사정이 곤난하여 학교에 못 다니는 아이들이 수두룩하였다. 가난때문에 학교문앞에도 못 가보고 집에 파묻혀있는 아이들을 볼 때면 불쌍해서 견딜수 없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생각하여 방학때 만경대에 가서 야학을 열었다. 그 야학방에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다 불러다놓고 글을 배워주었다. 처음에는 1학년용 《조선어독본》을 가지고 우리 글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학과목을 늘여 력사, 지리, 산수, 노래도 배워주었다. 내 일생에서 처음으로 되는 소박한 계몽활동이였다.

나는 동무들과 함께 성안에 자주 드나들면서 평양시민들의 생활형편도 만경대나 칠골사람들과 별반 다른 점이 없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평양의 인구 10만중에 기를 펴고 살아가는것은 얼마 안되는 일본사람들과 미국사람들뿐이였다. 미국사람들이 평양에서 경치가 제일 좋은 신양리일대에 틀고앉아 호의호식을 하였다면 일본사람들은 평양에서 제일 번화한 본정과 황금정일대에 자기네 거주지역을 만들어놓고 풍청거리였다.

미국사람들이 사는 《양촌》이나 일본인거주지역에 벽돌집이 늘어나고 상점들이 늘어나고 례배당이 늘어났지만 보통강일대나 뺑대거리 같은 곳에는 빈민촌이 늘어났다.

지금은 보통강기슭에 천리마거리, 경흥거리, 봉화거리와 같은 현대적인 거리들이 들어서고 인민문화궁전, 평양체육관, 빙상관, 창광원, 초고층아빠트와 같은 큼직큼직한 건물들이 솟아나 옛 모습을 찾을길이 없지만 내가 창덕학교에 다니던 그때만 해도 거기에는 거적문을 해달고 판자를 모아 지붕을 얹은 움집들이 올망졸망 들어앉아있었다.

내가 조국으로 돌아온 그해는 평양지방에 전염병까지 퍼지여 시민들이 모진 고통을 겪고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홍수의 피해를 입어 온 도시가 형용하기 어려운 곤난을 당하였다. 《동아일보》는 그해 홍수로 인한 참상을 전하면서 평양시내 총 호수의 절반에 달하는 1만여호의 집들이 물에 잠겼다고 하였다.

지금 보통강광장뒤에 세계에서 제일 큰 105층짜리 류경호텔이 일어서고있는데 그 자리에서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옛날에 얼마나 초라한 오두막을 짓고 어려운 생활을 하였는지 새 세대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것이다.

나는 그때 이런 현실을 체험하면서 근로하는 인민이 잘살수 있는 사회를 갈망하게 되였고 일본제국주의침략자들과 지주, 자본가들을 더욱 증오하게 되였다.

내가 창덕학교에 다닐 때 일본에서 간또대지진이 일어났다. 그 지진에 대한 소문이 칠골에까지 날아와 학생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지진을 계기로 조선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당치 않은 구실을 조작해가지고 일본의 극우익분자들이 군대를 내몰아 조선동포들을 수천명이나 학살하였다는것이였다. 그 사건이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그 소문을 듣고 일본이 입으로는 《일시동인》이나 《일선융화》를 부르짖고있지만 실지로는 조선사람들을 짐승만큼도 여기지 않는다는것을 더욱 심각하게 깨닫게 되였다.

그후부터 나는 일본순사들이 타고 다니는 자전거만 보아도 가만 놔두지 않았다. 널판자에 못을 여러대 박아 길바닥에 파묻어놓으면 어떤 자전거든지 영낙없이 다이야가 터지군 하였다.

일제를 증오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사상감정은 우리가 만든 음악유희 《열세집》에도 반영되였다. 음악유희 《열세집》은 13명의 학생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며 마분지로 만든 열세개 도의 지도를 붙여 조선지도를 만드는 춤이다.

1924년 가을철운동회때 이 음악유희를 무대에 올렸는데 공연도중에 순사가 운동장에 나타나 당장 걷어치우라고 야단을 쳤다. 자그마한 운동회를 하나 열려고 해도 경찰기관의 사전승인을 받아야 하고 설사 승인을 받았다고 해도 순사의 립회가 있어야 하던 세월이였다.

나는 강량욱선생을 찾아가 자기 나라의 산천을 사랑하며 노래하고 춤추는것이 무슨 잘못인가, 놈들이 뭐라고 하든지 공연을 계속하자고 주장하였다.

강량욱선생은 다른 교원들과 함께 순사의 부당한 처사를 규탄하고 《열세집》의 공연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우리와 같은 소학생들도 이처럼 강한 애국정신, 반항정신을 가지고있었으니 어른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내가 조국에 나온 그해 여름 평양에서는 양말공장 로동자들의 총파업이 있었다. 그때 신문들이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하였다.

나는 그 소식을 들으면서 일본이 비록 기만적인 《문화통치》에 매달리고있지만 조만간에 3.1인민봉기보다 더 큰 반항에 부딪치게 될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이렇게 두해를 보내다가 창덕학교졸업을 몇달 앞둔 어느날 외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가 또다시 일제경찰에 체포되였다는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였다. 하늘이 무너져내리는것 같았다. 나는 무서운 분노와 적개심에 휩싸였다. 칠골에서도 만경대에서도 어른들은 사색이 되여 내 얼굴만 지켜보았다.

나는 아버지의 원쑤, 우리 일가의 원쑤, 조선민족의 원쑤를 갚기 위하여 사생결단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다지고 떠날 차비를 하였다.

내가 팔도구로 가겠다고 하자 외가집에서는 가도 졸업이나 한 다음에 가라고 하였다. 만경대의 할아버지도 이모저모로 설복하였다. 몇달만 지나면 학교도 졸업하고 날씨도 따뜻해질터인데 그때를 기다려 떠나도록 하라는것이였다.

나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 아버지한테 불행이 닥쳐왔는데 내가 어떻게 여기서 편안히 앉아 공부를 할수 있겠는가, 하루라도 빨리 가서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고생하는 어머니를 도와드려야 한다, 내 이제 아무데 간들 피값이야 못하겠는가고 생각하였다.

할아버지는 내 마음을 돌려세우기 힘들다는것을 깨닫자 태도를 바꾸어 내 결심대로 하라면서 아버지가 령어의 몸이 되였으니 이제는 네가 나설 차례라고 하였다.

다음날 나는 집안어른들의 전송을 받으면서 고향을 떠났다. 그날은 할아버지, 할머니도 울고 삼촌도 울고 온 집안이 다 울었다.

나를 바래우려고 평양역에 나왔던 작은외삼촌(강창석)도 몹시 울었고 칠골에서 학교를 같이 다니던 강윤범이도 슬피 울었다.

창덕학교시절의 동창생들가운데서 제일 가까운 동무가 바로 강윤범이였다. 그도 배짱이 맞는 동무가 없다나니 나한테 늘 놀러 오군 하였다. 우리는 뿌르르 하면 같이 성안에 들어가군 하였다.

기차가 떠날 시간이 다되였을 때 강윤범은 나에게 밥꾸레미와 함께 봉투 한장을 주었다. 너와 헤여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겠기에 서운해서 몇자 적었으니 차칸에 올라가 뜯어보라고 하였다. 나는 그의 말대로 차가 떠난 후 봉투를 뜯어보았다. 봉투속에는 짤막한 편지 한장과 돈 3원이 들어있었다.

그때 그 편지와 돈을 보고 내가 얼마나 감동되였는지 모른다. 동무를 생각하는 마음이 크지 않고서는 그런 인사를 차릴수가 없다. 그때 형편에서 어린 나이에 돈 3원을 마련한다는것이 헐한 일이 아니였다. 아버지의 원쑤를 갚는다고 막상 떠나기는 하였으나 사실 나한테는 그때 로자가 문제였다.

강윤범이가 나를 궁색한 처지에서 구원해준셈이다. 그도 그 돈을 구하기가 무척 뻐근했던 모양이다. 해방이 되자 그가 나를 찾아왔기에 내가 첫인사로 돈을 받고 고마왔던 20년전의 이야기를 하니 자기도 그때 그 돈을 힘들게 구했노라고 실토하였다. 정말 부자들의 백만금에도 비길수 없는 돈이였다. 그 돈 3원에 실려있는 순결하고도 아름다운 우정의 무게를 무엇으로 다 헤아릴수 있겠는가. 돈에서는 우정이 생기지 않지만 우정만 있으면 없던 돈도 생기고 별의별것을 다 얻을수 있다.

강윤범은 그때 나보고 장군은 산에서 나라를 찾기 위해 투쟁했지만 자기는 별반 한 일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힘을 합쳐 새 나라를 건설해보자고 하였다. 나는 강윤범에게 지금 건국사업에서 제일 걸리고있는 문제가 간부부족인데 학교를 세우는 일을 한부분 맡아주지 않겠는가고 하였다. 그는 선뜻 응해나섰다. 얼마후 그가 조촌에다 학교를 하나 세우고 그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기에 내가 삼흥중학교라는 이름을 달아주었다. 삼흥이란 지, 덕, 체 세가지가 다 흥한다는 뜻으로서 깊은 지식과 고상한 도덕품성과 건장한 체력을 다 갖춘다는것이다.

강윤범은 그후 종합대학건설을 책임지고 일을 잘하였다. 지금은 대학 하나를 건설하는것이 그닥 큰 문제로도 되지 않지만 그때는 자금도 없고 자재도 없고 건설기능자도 없어 곤난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그는 일하다가 걸린것이 있으면 나를 찾아왔고 우리 집에서 잠을 같이 자면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밤새도록 의논하군 하였다.

강윤범은 나를 광복의 길로 전송해준 잊지 못할 동지였고 친우였다. 나는 지금도 그날 평양역에서 눈물을 머금고 나를 바래주던 강윤범의 모습을 잊지 않고있다.

성주, 너와 헤여지자니 눈물이 나서 못견디겠구나. 이제 헤여지면 언제 또 만나게 될가? 우리 서로 만리밖에 있어도 잊지 말고 창덕학교시절을 생각하자. 내 고향을 생각하고 내 나라를 생각하자.

그때 그가 준 쪽지에는 이런 내용의 글이 적혀있었다.

나는 이런 우정과 의리에 고무되여 또다시 험한 고개들을 넘고 또 넘었다. 만경대를 떠나 열사흘째 되는 날 저녁에는 포평에 도착하였다. 나는 나루터에 다달은 다음에도 인차 압록강을 건느지 못하고 강뚝에서 서성거리였다. 팔도구로 건너가자니 지나온 조국산천이 자꾸만 발목을 잡아당기였다.

내가 고향을 떠날 때 사립문밖까지 따라나오면서 내 손을 쓸어주고 옷깃을 여며주고 눈보라를 걱정해주며 눈물짓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삼삼히 떠올라 발걸음을 옮길수가 없었다. 이제 뚝을 넘고 강만 건느면 눈물이 마구 쏟아져나와 견디지 못할것 같았다.

찬바람이 불어대는 두 나라 지경에서 신음하는 조국산천을 돌아보니 사랑하는 고향으로, 고향집으로 다시 달려가고싶은 충동을 억제할수 없었다.

조국에서 보낸 세월은 비록 두해밖에 안되였으나 그 기간에 나는 많은것을 배우고 체험하였다.

가장 귀중한 체험은 우리 인민이 어떤 인민인가를 깊이 리해하게 된것이였다. 우리 인민은 소박하고 근면하면서도 용감하고 강의한 인민이였다. 어떤 곤난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억센 인민, 례절이 바르고 인정이 풍부하면서도 불의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인민이였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연정회의 간판을 가지고 반동적인 《자치》운동을 벌리고있었으나 로동자와 농민, 청년학생들을 포함한 광범한 인민대중은 피를 흘리면서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고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 어떤 힘으로써도 훼손시킬수 없는 민족의 존엄과 강철같은 독립의지를 뜨겁게 감수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 인민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인민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런 인민을 잘 조직동원한다면 얼마든지 나라를 찾을수 있으리라는 신심을 가지게 되였다.

나는 《문화통치》의 간판뒤에서 나날이 늘어나는 군대와 경찰과 감옥들을 보면서, 우리 조국의 재부를 끊임없이 략탈해가는 화차들과 화물선들을 보면서 일제야말로 우리 인민의 자유와 존엄에 대한 가장 흉악한 교살자이며 우리 인민에게 참을수 없는 가난과 굶주림을 강요하는 악독한 착취자, 략탈자라는것을 똑똑히 깨닫게 되였다.

조국의 숨막히는 현실은 나로 하여금 조선민족은 오직 투쟁을 통해서만 일제를 몰아내고 독립된 조국에서 행복하게 살수 있다는 신념을 더욱 굳건히 품게 해주었다.

조국을 한시바삐 되찾고 그 모든것을 영원한 우리의것, 조선의것으로 만들고싶은 념원이 불길처럼 나의 가슴속에 타번지였다.

나는 경찰들의 눈을 피하여 포평나루터아래쪽으로 좀더 내려가 여울목에서 압록강얼음판에 발걸음을 무겁게 내디디였다. 폭이 백자도 되나마나한 그 강만 건느면 팔도구시가이고 그 강안거리에 우리 집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강건너쪽으로 발을 옮겨놓을수가 없었다. 조국을 하직하면 언제 다시 이 강을 건너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돌아서서 강뚝우에 나딩구는 조약돌을 하나 집어들고 손바닥에 감싸쥐였다.

조국의 표적이 될수 있고 조국을 추억할수 있게 하는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가지고 가서 소중히 간수하고싶었다.

그날 압록강가에서 나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심리적체험을 하였다. 그날의 그 체험이 가슴속에 지울수 없는 상처를 남기였기때문에 나는 조국에 개선한 후 국내애국자들이 나를 환영하여 차린 연회석상에서도 압록강을 건늘 때의 이야기를 먼저 하였다.

나는 입속으로 그 누군가가 지은 《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강건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였다.

일천구백십구년 삼월 일일은

이내 몸이 압록강을 건넌 날일세

년년이 이날은 돌아오리니

내 목적을 이루고서야 돌아가리라

압록강의 푸른 물아 조국산천아

고향땅에 돌아갈 날 과연 언젤가

죽어도 잊지 못할 소원이 있어

내 나라를 찾고서야 돌아가리라

나는 설음과 비분을 안고 조국산천을 몇번이고 돌아보았다.

조선아, 조선아, 나는 너를 떠난다. 너를 떨어져서는 한시도 살수 없는 몸이지만 너를 찾으려고 압록강을 건는다. 압록강만 건느면 남의 나라 땅이다. 그러나 남의 땅에 간들 내 너를 잊을소냐. 조선아, 나를 기다려다오.

이런 생각을 하다가는 다시 《압록강의 노래》를 불렀다.

나는 그 노래를 부르면서 내가 언제 다시 이 땅을 밟을수 있을가, 내가 자라나고 선조의 무덤이 있는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날은 과연 언제일가 하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을 하니 어린 마음에도 비감을 금할수 없었다. 나는 그때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눈앞에 그려보며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비장한 맹세를 다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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