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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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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권

제6권

제16장 압록강을 넘나들며
           (1937. 3 - 1937. 5)

제17장 조선은 살아있다
           (1937. 5 - 1937. 6)

제18장 중일전쟁의 불길속에서
           (1937. 7 - 1937. 11)

1. 새로운 정세를 맞받아

2. 김 주 현

3. 농민을 준비시키던 나날에

4. 독립려단시절의 최춘국

5. 9월호소문

6. 《혜산사건》을 겪으면서

제7권

제8권

처음|이전| 113/159 |다음|마지막

3. 농민을 준비시키던 나날에

중일전쟁발발후의 새로운 정세는 전민항쟁준비를 절박하게 요구하였다. 우리는 힘을 미리 길렀다가 때가 오면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작전에 전민항쟁을 배합하는 방법으로 조국광복을 이룩할 구상을 점차 무르익혀나갔다.

농민이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있던 우리 나라에서 그들의 참가없이는 전민항쟁이 성립될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농민은 로동자들과 달리 조직성과 의식성이 부족하기때문에 혁명의 주력군으로 삼기 곤난하다고 하였으나 우리는 견해를 달리하고있었다. 옳바른 지도가 보장되고 조직적으로 결속만 된다면 농민대중도 거대한 혁명력량으로 될수 있었다. 나는 이것을 1931년의 추수투쟁때 이미 체험하였다. 우리는 실지 체험을 통하여 농민대중을 혁명적으로 잘 준비시키기만 한다면 거대한 항쟁력량으로 될수 있다는것을 확신하게 되였다.

우리 조상들은 후대들에게 초라하고 가난한 농업을 넘겨주었다. 남들이 기계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 우리 나라 농민들은 원시적인 손로동으로 농토를 다루고 오곡을 가꾸었다. 그들은 대대로 내려오면서 봉건적인 질곡에 얽매여 지주계급과 봉건통치배들로부터 가혹한 착취를 당하였으며 갖은 천대와 멸시를 다 받아왔다.

농민들의 생활처지는 일제가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이후 더욱 악화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실시한 《토지조사령》과 《산미증식계획》, 《선농이만정책》 등의 강도적인 략탈정책으로 하여 조선의 농촌과 농업은 황페화되였으며 농민들의 빈궁화과정은 더욱 촉진되였다.

일제는 조선강점초기에 《토지조사령》의 명목으로 농민들의 수중에서 수십만정보에 달하는 토지를 략탈하였는데 그 농토들은 총독부와 《동척》, 《불이홍업주식회사》를 비롯한 식민지척식회사들과 일본본토에서 흘러들어오는 이주민들에게 분배되였다.

그후 일본이 《산미증식계획》을 발표하고 그것을 악착스럽게 추진시켜나간것도 기본목적은 자기 나라에 조성된 식량위기를 타개하는 한편 조선농촌에 자본수출을 대대적으로 하여 막대한 리윤을 짜내자는데 있었다.

일제가 발표한 《조선민사령》에는 《… 소작인은 불가항력으로 말미암아 수익에서 손실을 받았을 경우라 할지라도 소작료의 면제 또는 감액을 청구할수 없다.》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처지개선을 위한 조선농민들의 투쟁을 미연에 법률적으로 금지시키는 포고령과 같은것이였다. 소작인들은 아사지경에 이르러도 입을 봉하고 얌전하게 처신하라는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이처럼 농민들에 대한 일본인농장주와 지주계급의 략탈을 처음부터 제도적으로 확고히 보장하여주었다. 소작농이 전체 농민의 과반수를 차지하고있던 조선농촌의 실상을 고려해볼 때 이 《민사령》의 구속을 받고있던 우리 나라 농민들의 처지가 어느 지경이였겠는가를 가히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한가마니의 쌀이라도 더 뽑아내려는 일제와 지주계급의 강도적인 착취상은 실로 짐승들도 낯을 붉힐만큼 포악하고 탐욕스러운것이였다. 《동척》은 지방과 농장단위로 주재원 또는 관리원들을 두고 그밑에 농감이라는것들을 배치하여 소작인들을 엄격히 감시통제하게 하였다. 소작료를 체납하거나 영농에 《태만》하거나 농장주를 반대하는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당장에 소작계약을 취소하고 소작지를 회수하였다.

일본인농장주들은 사설구류소라는것까지 만들어놓고 농장측에 맞서서 불평을 부리거나 생존의 권리를 요구하는 소작농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들을 가차없이 잡아넣었다. 나는 창덕학교시절에 나까하라농장의 일본인들이 전야작업을 하는 조선농민들의 뒤에 장총을 들고 따라다니면서 어물어물하면 쏴죽이겠다고 위협한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너무도 분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적이 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농민들의 고혈로 생산된 쌀을 해마다 700만~1,000만석씩 본토로 실어갔다. 조선사람들에게는 그 대신 만주좁쌀이나 대두박을 가져다 먹이였다. 기름이 철철 흐르는 흰쌀은 왜놈들에게 다 빼앗기고 썩은 좁쌀로 끼니를 마련할 때 조선사람들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총독부의 비호를 받는 조선인지주들도 경쟁적으로 농민들의 등껍질을 벗기였다. 마름들과 고리대금업자들도 그에 합세하였다.

일제가 감행한 반동적인 농업정책은 조선농촌에서 계급분화를 촉진시키였다. 농촌에서 리농현상이 격증되고 화전민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계층이 형성된것은 계급분화의 결과로 이루어진 식민지특유의 서글픈 풍경이였다. 고향에서 더 살래야 살수 없게 된 농민들은 깊은 산중이나 무인지경에 들어가 화전농사를 지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입에 풀칠을 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화전농사도 안전한것은 아니였다. 총독부가 《산림보호》, 《산불방지》의 구실밑에 《화전민추방운동》을 벌리였던것이다. 나는 서간도에서 활동할 때 화전농사를 하다가 추방된 농민들을 여러명 만나보았다. 조선농민들의 대대적인 해외류출은 필연적인것이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사람들을 해외에로 몰아내는 대신 과잉인구의 격증과 식량부족으로 곤난을 겪고있는 본토에서 이주민들을 대대적으로 끌어들이였다. 그들은 《산미증식계획》 제1기로 규정한 15년간에만도 400만명의 일본농민들을 조선에 끌어들이려고 꾀하였다. 원래 다나까 기이찌는 1925년 9월에 일본헌정연구회를 내세워 《일본인 1,000만명 조선이식계획》이라는것을 발표하게 한적이 있었다. 그는 내각총리대신이 된 다음 척무성을 신설하고 그 이식계획의 실행에 착수하였다. 1,000만명의 과잉인구가 조선에 그대로 흘러든다면 이 나라는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 민족은 일본인의 사태속에 파묻혀 숨도 변변히 쉬지 못할것이 아닌가.

일제의 반동적인 농업정책은 우리 나라 농촌에서 농민들의 생활을 령락시키고 민족적, 사회적, 계급적모순을 격화시키였다.

농민대중은 생존권을 위해 궐기하였다.

3.1인민봉기이후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소작인조합, 소작상조회, 농우회, 작인동맹 등 농민단체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농민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초기의 대표적인 단체는 소작인조합이였다.

일제통치하의 우리 나라 농민운동에서 주류를 이룬것은 소작쟁의였다. 1920년대의 소작쟁의는 대체로 소작권의 확보와 소작료감하문제를 비롯한 경제적구호를 들고 진행되군 하였다. 이 쟁의를 주관한것이 다름아닌 소작인조합이였다. 농민조합은 해방전 우리 나라 농민운동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주도적인 조직형태였다. 이 조직은 객관적정세발전의 요구에 따라 농민운동앞에 생존을 위한 경제적구호와 함께 정치적요구를 반영한 구호도 동시에 제기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전국적성격을 띠고 출현한 첫 대중조직은 조선로동공제회였다. 로동공제회에는 농민부 또는 소작인부를 설치하고 소작농민들을 다수 망라시킴으로써 농민운동발전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초기농민운동은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일제는 농민들의 소작쟁의가 점점 격렬해지자 경찰을 동원하여 총칼로 탄압하고 선봉에 선 농민운동의 선각자들을 마구 체포하였다. 한편으로는 《조선농회》산하의 어용조합들을 통하여 농민들을 회유하고 농민세력을 분렬시키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초기농민운동이 우여곡절을 겪게 된것은 민족개량주의자들과 초기공산주의운동자들이 끼친 부정적인 후과와도 많이 관련된다. 그 당시 농민운동을 조직하고 지휘한 태반의 지도자들은 순수한 농민이 아니였다. 그들속에는 소부르죠아지식인들과 민족개량주의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력사적조건에서는 피할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농민운동의 지도층에 들어간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순진한 농민들에게 《무저항운동론》을 주입하였다. 그들은 소작인들과 지주들은 공연히 아웅다웅하지 말고 서로 리해하며 의좋게 지내라고 설교하였다. 그렇게만 하면 소작인들과 지주와의 분쟁은 봄눈녹듯이 하루아침에 해결된다는것이였다.

농민운동의 지도층에는 초기공산주의운동자들도 적지 않게 들어가있었다. 농민운동이 앙양의 기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이 운동의 지도부에 들어가앉은 그들은 농민단체들을 자파의 영향밑에 두기 위한 파벌싸움에 열을 올렸다. 농민의 리익보다 자파세력확장에만 눈이 어두워진 그들의 파벌싸움으로 하여 농민운동은 피해를 많이 입었다. 농민단체 호상간에 혹은 한 단체안에 심한 반목과 대립이 생겨 수많은 농민단체들이 구실을 제대로 못하게 되였다. 하지만 그런 진통속에서도 농민들은 투쟁을 계속하였다.

농민들은 적들의 반혁명적인 폭력에 혁명적인 폭력으로 대답하였다. 1920년대말에 있은 룡천불이농장 농민들의 대중적인 진출과 단천, 영흥(금야)지방 농민들의 대규모적인 폭동은 그 대표적인 실례로 된다. 룡천불이농장에서 일어난 소작쟁의는 룡천지구에 나가있던 《ㅌ.ㄷ》계렬의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과의 련계밑에 진행된 대중적인 폭력투쟁이였다.

국제적색로동조합과 그 산하조직인 범태평양로동조합 비서부가 1920년대말과 1930년대초 몇차례에 걸쳐 태평양연안의 여러 나라들에서 적색로조와 적색농조를 조직할데 대한 문제를 제기한 후 조선에서는 혁명적인 로동조합과 농민조합을 내오기 위한 구체적조치들이 취하여졌다.

그리하여 1930년대초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적색농조가 새로 조직되게 되였으며 종래의 농조조직들도 적색농조로 개편되게 되였다. 《적색》 또는 《좌익》이라는 말은 개량주의와 구분하기 위하여 쓴 표현이였다. 그 당시 공산주의운동권에서는 어디서나 《적색》이라는 표현이 범람하고있었다.

적색농조의 압도적다수는 북부조선일대에 집중되여있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의 농민단체들의 과반수는 남부에 있었다. 소작쟁의도 북부보다 남부에 더 많았다. 그것은 호남벌을 끼고있는 조선의 남부지방에 북부지방보다 농호수가 훨씬 많았던 사정과 관련된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농민운동의 주되는 전선은 남부로부터 북부로 옮겨졌다. 혁명적인 농민단체의 수자도 북부에 더 많았고 격렬성을 띤 농민들의 투쟁건수도 북부에 더 많았다. 농민운동의 중심이 남부조선으로부터 북부조선으로 옮겨지게 된 근본원인은 백두산이 조선혁명의 책원지로 되고있었고 그 일대가 간도나 쏘련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놓여있었기때문이였다고 볼수 있다.

적색농조는 북부조선일대뿐아니라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남부조선일대에도 조직되였다.

중국 동북지방과 북부국경지대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직전개된 항일무장투쟁은 적색농조가 번성할수 있게 된 힘있는 요인으로 되였다. 사실 항일무장투쟁이 개시된 후 북부조선에서 나온 농민조직들은 다 국내인민들이 우리와 련계를 가지고 반일투쟁을 벌리는 과정에 나온것이지 자연발생적으로 나온것이 아니다. 당시 함흥지방 법원에서 작성한 명천농조사건공판록에 올라있는 농조결의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 투쟁의 결과 연길현의 사무실소각, 일본령사관 분서가 소각, 일본군대와 교전, 일본군 퇴각, 김일성총지휘하에 혁명투쟁에 진출함》

이것은 당시 북부조선일대의 농조들이 항일무장투쟁의 영향하에 활동한데 대한 단적인 실례로 된다.

그러나 적색농조가 주관하는 농민운동에는 좌경기회주의자들과 민족개량주의자들의 해독적책동으로 인한 간과할수 없는 부족점들이 존재하고있었다.

좌경기회주의자들은 농조조직들에 《적색》이라는 모자를 씌운 다음에는 울타리를 높이 쌓고 관문주의를 실시하였다. 그들은 소작농들과 빈고농이외의 모든 농민들은 다 적대계급이나 동요하는 계층으로 규정해놓고 농조의 울타리가까이에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애국적인 중농이나 반일감정이 강한 지주들이 적색농조의 대문으로 들어서는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로 되여있었다. 한동네에서 적색농조가 먹는 우물이 다르고 비농조주민들이 먹는 우물이 다른 마을도 있었다고 하니 그 시절의 관문주의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누구나 쉽게 상상할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적색농조의 관문주의는 비농조성원들의 애국열에 찬물을 끼얹고 그들로 하여금 농조가 하는 모든 일에 적의를 가지고 대하게 하였으며 자식들까지도 농조편과 비농조편으로 갈라지게 하였다.

적색농조활동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결함은 《타도식》일본새였다. 적색농조성원들은 무슨 일을 한가지 해도 처신을 과격하게 해야 혁명성이 있는것으로 여기였다. 례를 들어 농조상층이 미신타파를 하라고 하면 그들은 례배당가까이에 가서 돌멩이로 유리창을 박산내든가 지붕꼭대기에 있는 십자가를 자빠뜨리였다. 그리고 국사당을 파괴하고 거기에 놓인 음식들을 마구 짓밟아버리였다. 지어는 례배당으로 들락날락하는 신자들의 성경책을 빼앗아가지고 그것을 만사람들앞에서 찢어버리기도 하였다. 조혼을 반대하라고 하면 말을 타고 신부를 데리러 가는 신랑행차를 습격하여 말을 압수하든가 신랑을 억류하는 방법으로 결혼식을 파탄시킨 농조조직도 있었다. 이런 경우에 어린 신랑들은 혼비백산해서 집으로 도망가든가 공포에 질려 엉엉 울었다.

농조조직들이 민족해방이나 계급해방을 위해서는 실정에 부합되는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도 부분적인 활동에서 처신을 거칠게 하였기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농조가 하는 일이면 덮어놓고 머리를 흔들었다.

적색농조조직들의 활동에서 우리가 최대의 약점이라고 본것은 자기 조직을 보호할수 있는 전략전술적대책을 똑똑히 세우지 못한것이였다. 이런데로부터 적들의 탄압과 종파분자들, 민족개량주의자들의 해독작용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적지 않은 농조단체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직을 로출시키군 하였다. 농조우물이 다르고 비농조우물이 다르면 조직군중을 로출시킬수 있다고 생각해야 할텐데 농조지도자들은 그런 리치를 무시하였다. 적의 밀정들은 집안에 올방자를 틀고 가만히 앉아서도 창구멍을 통해 농조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는 집이 어떤 가정들인가를 잠간사이에 식별해낼수 있었다.

어떤 농조조직들은 오늘날 집권당의 외곽단체들이 하는것처럼 회원명부나 회비납부대장까지 그쯘하게 갖추어놓고있었는데 이것도 역시 조직을 로출시킬수 있는 근원으로 되였다. 아지트를 한번씩 습격할 때마다 적들은 회원명부를 압수해가군 하였다. 경찰들은 그 명부를 보고 농조원들을 빠짐없이 색출해냈다. 그것도 한꺼번에 200~300명씩 무데기로 잡아갔다.

이 몇가지 실례들은 농조단체들이 조직의 비밀이나 안전을 위해서 엄격히 경계해야 할 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시하고 무분별한 로출증에 빠져 벌거벗은 상태에서 적들과의 대결을 해왔다는것을 의미한다. 이 로출증은 적들에게 농조조직을 전면적으로 파괴할수 있는 가능성을 주었다.

농조조직들은 농민단체 호상간에 련대성과 통일적인 보조를 취하기 위한 활동체계도 갖추지 못하고있었다.

이 모든 결함들은 농조조직에 대한 옳바른 공산주의적지도가 보장되지 못한 우리 나라 농민운동의 령도상약점과 미숙성으로부터 오는것이였다. 농민운동을 지도한 상층은 이 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한 과학적인 타산과 정확한 전략전술을 가지고있지 못하였다.

그러나 적색농조운동은 이러한 약점과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 농민운동발전에서 무시할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 견실한 농조지도자들과 농조에 망라되였던 수많은 농민대중은 자기들의 정치경제적요구를 실현하기 위하여 일제의 거듭되는 검거선풍에도 굴하지 않고 반일, 반지주투쟁을 줄기차게 벌리였다.

우리는 농조운동과정에 발휘된 농민대중의 이러한 용감성과 대중성, 견인불발성을 매우 중시하였다. 우리가 로동계급과 함께 농민대중을 전민항쟁력량의 기둥으로 본것은 지극히 정당한 일이였다.

중일전쟁의 개시는 우리에게 전민항쟁준비를 가속화할수 있는 가능성을 주었다. 이 준비작업에서 우리 나라 인구의 80%이상을 차지하고있는 농민대중을 어떻게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가 하는것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있었다. 로동계급과 함께 국내의 농민대중을 혁명화하는것은 항일혁명수행에서 우리가 선참으로 틀어쥐고나가야 할 중요한 생명선이였다.

나는 농민을 전민항쟁력량으로 준비시키는데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가 국내에 있는 기성농민조직들을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으로 개편하는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적지 않은 군정간부들은 국내의 기성조직들에 이것은 좌경이고 저것은 우경이라는 식의 감투를 씌우면서 덮어놓고 부정적으로 대하였다. 과거의 농조는 없었던것으로 치고 새로운 농조들을 조직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것이 그들의 견해였다.

과거의 농민단체나 농민운동은 다 보잘것없는것이고 재생시키거나 재편성할 가치가 없다고 보는것은 허무주의였다. 그런 허무주의적견해는 공산주의운동자체의 요구와 조국광복회창립선언의 취지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기성의 농민운동이 쌓아올린 토대와 성과를 스스로 줴버리는것으로서 농민들을 묶어세우는데 있어서도 백해무익한것이였다.

우리의 구상은 그것이 반일을 지향하고 반제반봉건을 지향하는것이라면 명칭이라든가 공로의 대소를 불문하고 모든 기성조직들을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아래 묶어세우자는것이였다. 문제는 조국광복회10대강령과 창립선언의 취지에 맞게 해체직전에 이른 지난날의 농조조직들을 어떻게 재조직하고 재편성하는가 하는데 있었다.

우리는 전민항쟁준비와 관련한 지휘관모임에서 국내의 모든 로조단체들과 농조단체들을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으로 개편하거나 그 영향하에 둘데 대한 방침을 채택하였다. 국내의 기성운동단체들을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으로 개편하거나 그 영향하에 둔다는것은 국내혁명운동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인 령도를 실현한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우리는 이런 관점을 가지고 국내에 파견할 정치공작원들을 선발하였다.

당시 우리 혁명대오안에는 김영국, 안덕훈과 같이 국내에서 농조활동을 해본 동무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가 가까이 끼고있는 서간도에도 지난날 국내에서 독립운동이나 농조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국내농민운동에 대한 우리의 지도는 여러 갈래의 선을 통하여 실현되였다.

농조운동에 대한 우리의 령도를 보장하는데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것은 우리 주력부대에서 선발된 정치공작원들과 서간도지방의 조국광복회조직들에서 육성된 지하조직원들이였다. 그들이 국내농민운동을 변혁하는데서 쌓은 업적을 리해하려면 함경북도 남부지방에 침투된 정치공작원들의 활동내용만 보아도 충분할것이다.

조국광복회가 창립된 후 우리는 조정철, 류경수, 최경화, 조명식 등 파악있는 정치공작원들을 이 지구에 파견하였다. 이런 사람들이 국내에 들어가 농조핵심들을 장악한 다음 그들중에서 똑똑한 사람들을 선출하여 우리에게도 보내고 각 지방의 농조조직들에도 파견하였다.

성진농조지도자의 한사람인 허성진도 리병선이라는 농조출신정치공작원의 소개로 우리의 인맥을 잡게 되였다. 그는 나의 부름을 받고 서간도에까지 찾아왔다. 중평광산습격사건의 후과로 비록 나를 만나지는 못하였으나 갑산에서 박달을 통해 국내혁명운동에 대한 우리의 로선을 전달받는데 성공하였다. 고향에 돌아간 허성진은 1937년 9월에 열린 함경북도 남부 3개군 망명자들의 모임에서 국내혁명운동에 대한 우리의 방침을 전달하였다. 이 모임을 계기로 하여 통일전선전략을 포함한 우리의 혁명로선은 함경북도일대에 널리 전파되였다.

정치공작원들은 국내혁명가들과 농조열성자들속에 깊이 들어가 전민항쟁과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대한 우리의 사상으로 그들을 무장시키고 농조조직을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으로 개편하거나 그 영향하에 두기 위한 조직건설사업을 위해 불면불휴의 노력을 바치였다.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공작원들과 견실한 농조지도자들의 공동의 노력에 의하여 국내의 농민운동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국내농조조직들의 동향에서 주목할만 한것은 항일유격대에 대한 열렬한 동경심이였다.

1936년 가을 명천에서 진행된 부녀친목대회의 국제국내정세에 관한 보고에서 《… 19도구로농쏘베트의 수립, 김일성은 선전대를 무어가지고 조선에 건너와서 선동선전을 하고있다. … 동지들이여, 이후부터 조선에 김일성이 건너올것은 확실하다.》고 지적한것이라든가 그와 비슷한 시기에 그 지방 농조가 작성한 한 결의문에서 《장백현! 쏘베트를 수립함에 있어서 19도구전투결과 목재 3,000t 소각, 영림사무소 소각, 일본령사관 소각, 주구 8명 랍치, 일본군대와 교전, 일본군대 퇴각, 김일성총지휘하에 이상과 같은 투쟁이 혁명적으로 진행되였다.》고 밝힌것이라든가 길주농조의 신문 《붉은 추모》가 10월혁명기념특집에서 《김일성부대를 적극 지원하자!》는 구호를 실은것 등은 경제문제를 주되는 쟁점으로 끌고나가던 지난 시기의 농민운동에 비해 적색농조시절의 농민운동이 얼마나 정치적색채가 짙고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는가를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적색농조를 비롯한 국내의 혁명조직들이 인민혁명군의 활동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것은 국내혁명운동에 대한 우리의 령도를 보장하는데서 유리한 조건으로 되지 않을수 없었다.

우리의 령도가 미치기 시작한 때로부터 국내의 농민운동에서는 획기적인 로선상변화가 일어났다.

국내의 적색농조조직들은 우선 계급투쟁일면에 치우치던 종래의 방식에서 벗어나 주되는 공격의 화살을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로 돌리였다. 농조의 일부 문건들에서 《농조××앞에 나서는 임무는 일본에 대한 군중의 불평불만을 혁명적적극성에로 인도하여야 한다.》는 문구를 찾아보게 되는것은 이런 실태의 반영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국내의 견실한 농민운동지도자들은 농조조직에 결속시킬 대상의 폭도 전에없이 넓히고있었다. 어떤 지방 선각자들의 간담회의 내용을 기록한 문건을 보면 그 당시의 농민운동지도자들이 농조의 기층조직에 빈농만이 아니라 중농과 부농을 포함하는 각계각층의 열성자들을 망라시킬데 대한 요구를 제기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는것을 알수 있다. 규률을 준수할줄 알고 비밀을 고수할줄 알며 투쟁욕이 있는 사람들은 계층에 관계없이 조직에 가입시키라는것이 농조조직건설의 일반적인 요구로 된것은 조국광복회창립선언과 10대강령의 취지에도 부합되는것이였다. 어떤 적색농조는 지어 자기산하에 소시민위원회와 학생위원회라는것까지 내오고 거기에 잡화상, 점원, 음식점경영자, 중개상인, 상업자본가, 자유로동자와 보통학교 학생들까지 망라시키였다.

국내의 일부 농조조직들은 반일투쟁에 량심적인 지주들까지 인입하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어떤 농조조직들은 도로부설공사를 반대하는 투쟁을 지도하면서 지주들을 선전대에도 망라시키였다. 그리고 자위단을 비롯한 일제의 말단통치기관들과 어용단체들에 조직원들을 침투시켜 그 조직들을 점차 《적화》하는 방법으로 합법적투쟁과 비합법적투쟁을 능숙하게 결합시키였다. 그들이 발행한 한 소책자에서는 합법적가능성을 거부하는 리론은 좌경기회주의적인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모든합법적가능성을 충분히 그리고 능숙하게 련결시킬것을 권고하고있다.

적지 않은 농조조직들은 활동에서 독자성을 보장하면서도 지방호상간에 일정한 련계를 가지고 실정의 통보로부터 시작하여 투쟁방법의 선택과 투쟁목표의 설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공동보조를 취하였다.

우리의 영향하에 적색농조운동에서 일어난 이러한 변화는 기성의 농민조직들을 혁명적으로 재편성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었다.

우리의 정치공작원들은 국내동지들과 손을 잡고 농조조직들을 혁명적으로 개편하는 사업에 적극 달라붙었다. 이리하여 함경북도와 함경남도의 많은 지역들에 어제날의 농조조직들을 바탕으로 하는 조국광복회조직들이 수많이 생겨났으며 신의주지회를 비롯하여 많은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이 압록강 중류지대의 농민들속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뿐만아니라 우리 사람들은 그때 평양, 남포, 철원, 서울, 인천, 대구, 부산, 전주, 광주에 있는 조국광복회조직을 거점으로 중부와 남부조선의 농민들속에서도 각이한 명칭을 가진 혁명조직을 내왔다.

우리 공작원들과 국내동지들은 농민대중을 조직적으로 결속하는 일과 함께 그들을 의식화하는 사업에 모를 박고 조선인민자체의 힘으로 조국해방을 이룩해야 한다는 자주독립정신으로 농민들을 무장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농민조직출판물들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에 대한 해설문을 대대적으로 실었다.

이러한 교양사업은 농민들로 하여금 자기의 력사적사명감을 높이도록 자극하였다. 농민단체들은 농민들속에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반대하는 반일사상을 계속 주입하고 국제국내정세와 사회발전의 합법칙성, 조선혁명의 전도, 조선인민혁명군의 눈부신 투쟁소식 등을 널리 선전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필승의 신념을 지니도록 하였다.

구월산과 벽성지구에 나간 우리 공작원들은 국내에서 활동하던 민덕원을 통하여 벽성지구 농조를 혁명적으로 개편하였다. 민덕원은 이어 벽성지구의 핵심들과 같이 배를 타고 인천지구에 나가 그곳 로조와 농조성원들을 의식화하는 사업을 정력적으로 진행하였다.

김정숙도 풍산지구를 거쳐 1937년 7월 중순에 단천, 리원지방으로 나갔다. 그때 그는 풍산군 파발리에서 리인모를 만나 적색독서회 관계자들을 핵심으로 조국광복회조직을 확대할데 대한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토의하였다.

리인모는 조선혁명군 국내공작소조가 파발리 내중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고 《오빠시》라는 별명을 가진 악질순사부장을 처단하였을 때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증견자의 한사람이다. 이 사건의 영향밑에 풍산지방의 선각자들은 적색독서회를 조직하고 반일투쟁을 시작하였다. 리인모도 그 독서회에 망라되여 활동하였다. 그는 1932년과 1933년 두차례에 걸쳐 약 1년간의 감옥생활을 하였다.

최근에 리인모를 직접 만나 알아본데 의하면 그는 우리와 련계를 지어보려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중요한 작전구역인 이도강에 두번이나 다녀갔다고 한다. 남만부대의 소부대가 동흥진을 습격하였을 때에는 거기에도 다녀올만큼 그의 참군시도는 열광적인것이였다. 그런 적극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직선을 찾지 못해 그가 우리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것은 아쉬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그때 만일 리인모가 우리를 만나는데 성공하였더라면 그의 인생행로가 완전히 달라졌을것이다.

리인모는 감옥밥을 두번 먹고나서도 투쟁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풍산지구혁명위원회 성원으로서 파발리분회와 황수원언제로동자돌격대, 안산후치령생산유격대 등의 조직들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김정숙은 1938년 9월 하순경에 또다시 풍산에서 리인모와 풍산지구혁명위원회에 망라되여있는 그의 동료들을 만나 조직을 확대강화하고 적구에서의 활동을 령활하게 벌릴데 대한 대책들을 협의하였다.

리인모는 김정숙을 만난 후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을 늘이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의 활동판도는 우리가 국내공산주의운동에 대한 령도를 실현하면서 필요한 대상의 하나로 점찍고있던 서울콩그뤂에까지 확대되였다. 이것은 리인모의 활동에서 가장 이채로운 점이였다. 그는 주병포와 함께 서울콩그뤂에 우리의 조국광복로선을 전달하고 서울의 운동권에 우리의 영향을 침투시키였다.

김삼룡에게 우리의 로선을 직접 전달한 풍산적색독서회시절의 리인모의 상급인 주병포는 룡정에서 동흥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반일학생운동에 참가한 사람이였다. 그는 1937년부터 서울의 어느 한 학교에 적을 두고 풍산에 자주 드나들면서 우리의 영향하에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깊은 련계를 맺고있었다. 그러는 과정에 풍산지방에 나가 활동하던 김정숙과도 선이 닿아 국내혁명에 대한 우리의 로선과 전략전술을 비교적 정확히 터득할수 있게 되였다. 김정숙은 주병포와 함께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조선일대에서 국내공산주의자들을 우리의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에 묶어세울데 대한 문제를 상론하였다.

리인모의 회상에 의하면 그 당시 김삼룡은 우리의 통일전선로선을 전달받고 매우 기뻐하였다고 한다.

주병포와 리인모는 서울지구의 금속, 방직, 섬유, 인쇄, 염색, 피복 등 여러 부문의 로동자들속에 깊이 들어가 로동계급의 선진분자들로 로조조직을 꾸리고 전민항쟁준비를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 한편 국내혁명조직들에 대한 우리의 령도를 실현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였다.

리인모는 국내혁명운동을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하였지만 일본땅에 조국광복회조직을 늘이는 사업을 위해서도 적지 않은 공적을 쌓았다. 1940년 여름에 그는 주병포의 지령에 따라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가지고 일본 도꾜에 건너가 풍산출신의 고학생들로 조직된 풍우동경고학생친목회를 혁명적으로 개편하였다.

보는바와 같이 리인모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니였다. 그를 세계적으로 이름난 신념과 의지의 화신으로 만들어준것은 조국광복회조직이였고 그 조직의 씨앗을 삼천리방방곡곡에 뿌리기 위해 천신만고를 다한 백두산의 투사들이였다.

풍산에서 사업일정을 마친 김정숙은 동해안 단천지구로 향하였다. 단천지방의 선각자들가운데서 우리가 특별히 점을 찍어두고있던 인물은 지난날 신간회에 관계하였던 단천농조의 지도성원의 한사람인 리주연이였다. 그는 1930년의 단천농민폭동에도 관여한 사람이였다.

김정숙은 그 지방 조국광복회원의 안내를 받아 먼저 리주연을 만났다. 단천농민폭동사건으로 7년간의 옥고를 치른 리주연은 그 당시 산에 있는 절간에서 병치료를 하고있었다.

김정숙은 감옥에서 고생을 하고 병까지 만난 리주연을 따뜻이 위로해준 다음 그에게 우리가 내놓은 반일민족통일전선로선과 전민항쟁방침을 전달하고 농민대중을 의식화, 조직화하여 전민항쟁력량준비를 다그칠데 대하여 이야기해주었다.

리주연은 자기가 지난날 무슨 운동을 한다면서 밤낮 뛰여다녔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라침판이 깨진 낡은 배에 앉아 날바다를 향방없이 떠다닌것 같아 허무하기 그지없었는데 이제는 새 배를 탄 심정이라고 하면서 혁명에 충실할것을 맹약하였다.

리주연과의 사업을 마친 다음 김정숙은 리원의 차호앞바다기슭에서 리용을 만났다. 리용이란 헤그밀사사건의 주인공인 애국렬사 리준의 아들이다. 그는 북청농조사건으로 체포되였다가 놓여나온 후 반일회를 조직지도하고있었다.

리준이 헤그에서 분사한 후 리용은 《너의 몸은 반드시 나라를 위해 바쳐야 한다.》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고 한동안 독립군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인차 그 운동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되였다. 독립군운동이라는것이 간판은 요란하지만 똑똑한 령도를 받지 못하는 이상 대사를 이룰수 없다는것을 깨달았던것이다.

리용은 한때 공산주의운동에도 적지 않게 관여하였다. 그렇지만 물우에 뜬 기름방울처럼 대중과 유리된 파벌들이 제 안속만 채우면서 싸움질로 세월을 보내고있는것을 보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가 그후에 깊숙이 관여했던 농조동네 역시 다툼질이 심하였다. 맑스의 본을 따서 장발을 한 행세식운동자들이 농조의 상좌에 틀고앉아 농민들에게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고있었다.

리용은 그런 꼴을 보다 못해 어느날 상좌의 장발쟁이를 단죄하였다. 그러자 상대방은 당신이 왜 이리 오만한가, 리준의 아들이 돼서 그런가, 만리밖에 나가 피를 뿌리며 호소나 한다고 누가 독립을 가져다준다던가 하고 그에게 면박을 주었다.

리용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자기가 모욕당하는것은 참을수 있었지만 아버지의 애국혼이 모욕을 당하고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쓰리고 원통하였다. 그 아픔은 여러해가 지나도록 가셔지지 않았다.

리용이 독립군운동, 초기공산주의운동, 농조운동에까지 참여해보고 얻은 결론은 아무리 힘있는 대중도 령도자를 못 만나면 용을 쓸수 없다는것이였다.

리용은 동지들을 조직에 묶어세우는 한편 백두산으로 닿는 선을 찾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김정숙은 후치령이남일대에서 농민대중을 묶어세워 전민항쟁력량을 준비할데 대한 우리의 구상을 리용에게 전달하였다.

리용은 우리의 뜻을 받들고 조국광복성업에 한몸바칠 굳은 각오를 다지였다. 그는 김정숙과 작별할 때 우리가 있어 조선의 명맥이 살아있다고 하면서 우리를 가리켜 조선국의 《정통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언제인가 나는 북부조선일대의 혁명조직들에서 교양자료로 쓴 《금란지계전》을 본적이 있었다.

출처를 알아보니 북청사람들이 만든것이였다. 북청군 청흥리에는 소나무가 많은 송전이 있다. 그곳은 경치가 좋고 조용하여 예로부터 지방유지들이 놀이터로 삼고 이따금 모여 풍월짓기를 하였다.

반일의식이 높은 북청지방의 핵심들은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유지들을 앞에 내세우고 《금란계》를 무었다. 금란계라는 말은 합심을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같고 향긋함이 란초와 같다는 의미로 친구간의 두터운 정의를 이르는 말이다. 가까운 친구들끼리 무은 계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북청의 핵심들은 대체로 《금란계》성원들이였다. 《금란계》성원들은 유지들을 앞세우고 자주 송전에 모여 글짓기놀이를 하는체 하면서 정신수양을 하였다. 그러던중에 계성원들가운데서 제일 견문이 넓고 박식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학자라고 존경받는 좌상회원이 《금란지계전》을 쓰게 되였다. 그 글에 바로 《정통령》이라는 말을 쓴 구절이 있다.

리용은 그해 9월에 북청지구 당소조를 내오고 그 책임자가 되였다. 초기 당소조성원들은 차호반일회 핵심들이였다. 그는 당소조를 움직여 차호반일회와 부근의 농조, 로조들을 조국광복회두리에 묶어세우면서 후치령이남의 동해안일대를 중심으로 전민항쟁세력을 꾸려나갔다.

백두산과 선이 닿은 다음 리주연의 생활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새로운 투쟁과업을 받은 그는 집에 돌아가기로 안해와 약속한 날에 집으로가 아니라 투쟁의 길을 떠났다. 7년세월을 하루와 같이 남편의 옥바라지만 해온 착실한 안해를 두고 고향을 떠나는 그의 마음속에서는 또다시 애틋한 련민의 정이 끓어올랐다. 그러나 리주연은 사사로운 감정을 억누르고 절간에 찾아온 안해와 결연히 리별하였다.

그는 절간을 떠난 후 해방이 될 때까지 8년동안 오붓한 가정생활이라는것을 모르고 홀몸으로 적들의 눈을 피해 부단히 자리를 옮겨가며 이르는 곳마다에서 동지들과 함께 로동자들과 농민들에게 반일투쟁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지혜와 정열을 다 바쳤다.

리주연과 리용은 백두산을 바라보며 싸우던 때처럼 해방후에도 변심없이 일을 잘하였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의 기발을 들고 통일전선운동과 전민항쟁준비를 위해 분투하던 국내농조조직의 조직자들가운데는 리원섭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농조를 조국광복회 하부조직으로 개편한 길주지구 반일지하조직의 책임자였다. 그가 지도하는 조직성원들은 혁명군을 지원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길주팔프공장에서 흰종이를 뽑아 백두산으로 계속 보내주었다. 당시 동해안일대의 농민조직들에서는 혁명군에 보내는 각종 필수품들을 신파, 혜산까지 자동차로 뻐젓이 실어다놓군 하였다.

농조활동가들은 농민대중속에서 우리의 무장투쟁에 호응하여 전민항쟁에 떨쳐나설것을 호소하는 선전선동활동도 활발히 벌리였다.

정평농조성원들은 감옥에 잡혀가서도 우리의 투쟁에 대한 선전활동을 많이 하였으며 명천일대의 농조활동가들도 그들에 못지 않게 우리를 선전하고 반일투쟁을 호소하였다.

전민항쟁을 준비하던 나날에 국내에서 우리의 로선을 받들고 희생적으로 싸운 애국렬사들은 천이나 만으로도 다 헤아릴수가 없다. 그 수많은 유명무명의 혁명가들은 우리 공작원들과 함께 전국도처에서 조국광복회산하에 수십수백만의 농민대중을 결속시키였다.

농조조직들이 혁명적으로 개편된 후부터 우리 나라 농민운동은 항일무장투쟁과 밀착되였다. 이것은 농민운동의 발전을 가속화할수 있는 유리한 조건으로 되였다. 전국의 농민단체들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을 통하여 반일민족통일전선을 강화하고 전민항쟁준비를 다그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 과정에 국내혁명은 수많은 농조활동가들과 애국적인 농조원들을 잃었다.

농민운동은 로동운동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주축으로 하는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투쟁사에서 뚜렷한 자기의 몫을 차지하고있다. 우리는 총칼이 란무하는 일제의 파쑈적인 학정밑에서 민족자주권의 부활과 농민의 계급적해방을 위해 생명까지 바쳐가며 싸워온 혁명선배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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