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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권

제19장 시련의 언덕을 넘어
         (1937.11 - 1938.11)

1. 마당거우밀영

2. 족제비사냥군

3. 독립군의 마지막부대

4. 왕촌장과 왕서장

5. 열하원정

6. 양정우와 만나

7. 리보익할머니

8. 남패자의 수림속에서

제20장 혁명의 새로운 고조를 향하여
         (1938.12 - 1939.6)

제21장 대부대선회작전의 총성
         (1939.7 - 1940.3)

제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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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열 하 원 정

열하원정은 중일전쟁발발을 전후한 시기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정치활동과 국내혁명운동발전에 엄중한 난관을 조성하고 전반적인 항일운동선상에 큰 손실을 가져다준 하나의 교훈적인 사변이다. 이 원정은 1930년대 중엽 세계각국에서의 혁명운동방략이 《국제로선》에 의하여 제기되고있던 정황에서 매개 나라 민족혁명이 겪지 않으면 안되였던 일반적인 난관이 어떤것이였는가를 반증하는 하나의 산 실례이며 구체적으로는 조선혁명의 자주로선이 얼마나 간고한 투쟁을 통하여 고수되고 관철되여왔는가를 보여주는 특기할 력사적사실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국제당으로부터 열하원정계획이 처음으로 시달되던 때의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하시였다.

열하원정으로 알려져있는 료서, 열하지구에로의 원정계획이 처음으로 우리에게 와닿은것은 1936년 봄이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들과 왕덕태를 비롯한 동북항일련군부대의 지휘성원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위증민이 국제당의 지시라고 하면서 열하방면에로의 원정계획을 전달하였습니다.

열하원정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동북지방의 항일무장부대들이 료서와 열하방면으로 진출하여 동정항일, 실지회복의 구호밑에 열하쪽으로 진격하는 로농홍군부대들과의 련합작전으로 중국관내에 쳐들어가는 일제침략군을 제압한다는것이였습니다. 국제당이 추구한 이 원정의 전략적목적은 북상동정하는 로농홍군(후에는 8로군)과 서정하는 항일련군부대들이 열하계선에서 합류함으로써 중국관내와 동북지방에서의 항일투쟁의 일체화를 실현하며 전반적항일운동에서 새로운 고조를 일으켜나간다는것이였습니다.

그 당시 남만의 1군과 길동지구의 4, 5군, 북만의 3, 6군 등 동북지방의 항일련군부대들은 장춘의 동쪽과 동남부 그리고 동북부지역에 반원호모양으로 분포되여있었습니다. 국제당의 전략적의도는 이 반원호를 서쪽으로 압축하여 장춘을 반달형으로 포위공격하고 열하계선까지 진출하여 북상하는 로농홍군부대와 합세하여 중국관내로 쳐들어가는 일제침략군을 타격하자는것이였습니다.

국제당은 열하원정계획의 실행을 통하여 관내혁명과 관외혁명이 통일적인 련관속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국면을 열어놓으려고 했던것 같습니다.

일제가 동북 3성을 강점하고 만주국을 조작할 때만 하여도 중국에서의 반일투쟁은 주로 동북땅에 국한되여있었습니다.

2만5천리장정과정에 중국당안에서 좌경기회주의로선이 분쇄되고 새로운 지도체계가 수립된 때로부터 중국인민의 항일투쟁은 보다 높은 발전단계에 들어서게 되였습니다. 관내에서의 항일운동의 급격한 장성은 동북지방사람들을 크게 고무해주었습니다.

열하원정계획이 시달됨으로써 열하땅은 다시한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중일대결의 열점으로 되였다.

발해만쪽에 있는 열하는 청나라시기의 열하성소재지로서 만청의 력사와 깊이 련관되여있는 도읍이다.

열하가 중국 청나라력사와 깊은 련관을 가지게 된것은 거기에 강희황제가 지은 청조의 리궁이 있었기때문이고 또 광한궁이라고 불리우던 그 리궁에서 청조의 이름난 건륭황제가 태여났기때문이라고 한다.

열하땅은 천험의 군사요충지로도 유명하였다. 열하서남쪽기슭의 산줄기들이 만리장성의 거점으로 되고있는것만 보더라도 이 고장이 예로부터 군사적으로 얼마나 중시되여왔는가를 잘 알수 있을것이다.

열하가 이처럼 인상깊은 고장이였기때문에 19세기 실학사상가의 한사람이였던 박지원도 리조봉건정부가 파견한 사신의 수원으로 중국에 갔다가 《열하일기》라는 장문의 기행문을 남기였다. 이 글에는 중국의 문물제도나 풍습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열하의 실상이 매우 실감있게 서술되여있다.

열하가 처음으로 세계적인 범위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고장으로 된것은 9.18사변이후 일제가 관내에로의 침공의 길을 열기 위해 금주와 열하를 점령한 때부터였다.

국제당으로부터 열하원정계획이 시달되였을 때 그에 대한 반응은 각이하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왕덕태는 처음부터 서정계획을 회의적으로 대하였습니다. 그는 몇천명밖에 안되는 유격대의 력량을 가지고 적의 군력이 밀집되여있는 만주국의 수도를 포위하라는것도 그렇고 산악지대의 본래근거지들을 떠나 멀리 평원지대로 진출하라는것도 다 께름직한 일이다, 그것은 유격전의 요구에도 맞지 않는다, 관내에서 로농홍군이 동정을 한다고 하여 우리가 서정을 할수는 없는것이고 이미 대도시에 대한 공격전도 실패하였는데 우리더러 그 전철을 다시 밟으라는것은 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고 하였습니다.

군벌들사이에 혼전이 벌어지고있던 1930년대초 중국당중앙의 지도권을 장악하고있던 리립삼은 혁명정세발전의 유리한 측면을 일방적으로 과장하여 우선 한개 성 또는 몇개 성에서 혁명이 승리할수 있다는 모험주의적결의를 채택하게 하고 여러 주요도시들에서 정치총파업과 무장봉기를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당지도부의 이 조치에 따라 홍군은 몇개의 주요도시들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전례를 보더라도 일부 사람들이 국제당의 작전계획에 불만을 표시한것은 응당한 일이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항일련군부대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은 국제당이 하는 모든 일을 다 공명정대한것으로 받아들이였습니다. 그런 때에 일부 지휘관들이 원정계획을 시답지 않게 본다는것은 주목해야 할 일이였습니다.

그러나 위증민은 이러한 의견을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령의 전달자로서 국제당의 계획을 변호해나섰습니다. 이번 원정에는 남만, 동만, 북만의 모든 항일련군부대들이 다 참가하게 되여있다, 국내의 형세도 매우 좋다, 그러니 승산이 영 없는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다른 의견들을 가볍게 론박하였습니다. 위증민은 그후 금천현에 가서 동북항일련군 1군의 군정간부들에게도 국제당의 열하원정계획을 전달하였습니다.

양정우는 그 계획을 받자 몹시 흥분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국제당의 지시를 그대로 집행할 의사를 명백히 밝혔습니다. 원래 양정우는 관내혁명과의 련계를 실현해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오던 사람입니다. 남만의 유격근거지가 관내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때문에 그런 련계는 충분히 가능하였습니다.

그 당시 관내의 로농홍군은 전국항일구국운동의 고조를 일으키기 위해 이미 북상하여 동정을 하고있었습니다. 양정우는 동정하는 관내의 항일선봉군과 힘을 합쳐 적들의 봉쇄를 분쇄하고 동북항일유격전쟁과 관내항일전쟁의 직접적련계도 실현하고 협동작전도 실현하려고 했습니다. 양정우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열하원정계획을 지지해나섰는가 하는것은 그후 두차례의 명백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열하방면에로 진출한 사실과 《서정승리가》까지 만들어 대원들을 원정에로 고무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잘 알수 있습니다.

국제당에 앉아있던 좌경모험주의자들은 우리에게도 열하원정을 단행할데 대한 지령을 여러차례에 걸쳐 하달하였습니다.

1936년 봄에 처음으로 열하원정을 요구한데 이어 중일전쟁이 발발된 1937년 여름과 1938년 봄에 또다시 열하원정에 참가할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국제당이 1, 2차원정을 요구하던 1936년과 1937년은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지구와 서간도일대에 진출하여 당창건준비와 통일전선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시키는 한편 무장투쟁을 국내깊이에로 확대하면서 기세를 올리던 때였으며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자기 나라 혁명은 자신이 책임지고 수행해야 한다는 자주적립장을 그 어느때보다도 확고히 견지하고 조선혁명의 주체를 강화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던 때였습니다. 혁명의 전도는 창창하였지만 우리앞에는 실로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었습니다.

우리의 노력에 의해 압록강연안과 국내에서는 혁명조직들이 우후죽순처럼 태여나고 수천수만명에 달하는 혁명가들이 자라나게 되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앞에는 이 조직들과 혁명가들의 활동을 무장으로 보호해주고 백두산지구와 서간도를 발판으로 하여 국내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이끌어올려야 할 중대한 과제가 나서고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승산이 없는 열하원정을 하라고 하였으니 우리의 심정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국제당이 원정을 하라고 강요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것을 무모한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 당시 우리가 내세운 조선혁명의 주체로선을 고수하면서 백두근거지를 새롭게 꾸렸고 조국안의 1군 2사와 협동하여 서간도일대에서 큰 전투도 여러차례 벌렸습니다. 또 대규모적인 국내진공작전도 적극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1군이 차지하고있던 남만의 일부 지역들의 군사적공백도 메우면서 료서와 열하방향으로 진출한 원정부대들의 활동을 성실하게 뒤받침해주었습니다. 말하자면 무장투쟁의 불길을 국내에로 확대할데 대한 자주적인 로선을 확고히 틀어쥐고나가면서도 국제당이 제시한 로선집행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는 일석이조의 성과를 올리였습니다.

남만의 무장부대들이 열하와 료서쪽으로 한창 진출하고있을 때 국제당지령의 전달자인 위증민자신은 1군부대들을 따라가지 않고 주로 우리와 함께 다니였습니다.

열하원정계획이 매우 무모하고 비현실적인 군사작전이였다는것은 중일전쟁발발후 더욱 명백히 드러나게 되였습니다. 종전에도 그랬지만 국제당은 이 시기에 와서도 《반달형포위》라는 꿈을 버리지 않고 항일련군부대들에 승산없는 서정을 계속 요구하였습니다. 중일간의 대결이 전면전쟁으로 번져지고 그것을 계기로 항일운동이 급격히 고조되자 국제당은 또다시 《반달형포위》를 성사시킬수 있는 결정적시기가 도래했다고 본것 같습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그해에 중국에서는 제2차 국공합작이 실현되였습니다. 공산당이 령도하는 로농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되였으며 수원, 차하르, 열하에로의 진격을 지향하면서 기세를 올리고있었습니다.

국제당은 열하원정과 관련된 새로운 지령에서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그전날 1군이 차지하고있던 해룡, 길해선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서 장춘을 반달형으로 포위하는 작전에 직접 참가하며 열하쪽으로 진격하는 1군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할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요구대로 한다면 우리는 조선혁명의 책원지인 백두산근거지를 떠나 멀리 서쪽으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중국본토전체가 싸움터로 된 조건에서 8로군 열하진격대와의 합류라고 하는 문제설정은 솔직히 말해서 별의의가 없는것이였습니다.

우리가 열하에로의 원정계획을 비현실적인것으로 보게 된 다른 하나의 리유는 그것이 유격전의 요구에 맞지 않는다는 사정과도 관련되여있었습니다. 유격대가 산악지대를 떠나 벌방으로 진출한다는것은 고기가 물을 떠나 뭍에 오르는것과 같은 위험천만한 모험이였습니다. 동만과 남만, 북만의 산악지대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오래전부터 개척해온 고장이여서 군중토대가 좋고 지리적파악도 깊었습니다. 그런데 항일련군부대들이 본래의 활동구역을 떠나 열하나 료서까지 가려면 적의 요충지들이 집결되여있는 남만철도계선의 넓은 평원지대를 통과해야 하였습니다.

그 넓은 평지에서 대포나 땅크와 같은 중무기를 가지고있는 적의 정규군과 맞다든다면 경무기밖에 없는 유격대의 처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 일입니다.

열하땅은 8로군측으로 볼 때에는 만리장성만 넘어서면 지척에 있는 고장이지만 동북에 있는 항일련군측으로 볼 때에는 수천리 떨어진 먼곳에 있었습니다.

력량이 상대적으로 약한 유격대가 수적으로 수십수백배나 되는 적들이 처처에 집결되여있는 평야지대를 지나 그처럼 먼거리를 행군해간다는것은 초보적인 군사상식에도 어긋나는것이였습니다.

나는 열하원정이 군사전략상 무모한 원정이라는데 대해서 위증민에게 여러번 말해주었습니다.

열하원정이 꼭 필요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위증민도 점차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중일전쟁이 일어난 조건에서 원정의 성공이 전 중국적판도에서 항일고조를 일으키게 되고 항일제일주의의 기치를 시종일관하게 고수하고있는 공산주의자들의 견실한 반일정신과 참된 애국주의를 과시하게 될것이라는 한가닥의 미련만은 버리지 못하고있었습니다. 열하원정이 성공하면 장개석을 적극적인 항일에로 이끌어가는데서도 유리한 국면을 열어놓을수 있다는것이 그의 견해였습니다.

나는 위증민에게 중국전체에서 항일고조를 일으키는것도 필요하고 공산당의 진면모를 과시하는것도 필요하며 또 장개석을 적극적인 항일에로 유도하는것도 물론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동북혁명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그런 결과를 얻으려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동북혁명을 위해서 조중 두 나라 인민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가고 했습니다.

그러나 위증민은 자기의 립장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군사전략상의 견지에서 볼 때 열하원정계획이 일정한 약점을 내포하고있는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크게 해보지도 않고 그것을 회피할수야 없지 않는가, 물론 원정을 하느라면 아까운 희생도 내고 예상치 않았던 손실도 당하게 될것이다, 그렇지만 희생이나 손실이 없이 어떻게 대사를 치를수 있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위증민은 주보중의 5군과 4군도 중일전쟁발발을 서정실현의 좋은 계기로 보고 지령집행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고있다고 하였습니다.

위증민의 그 말은 사실이였습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길동지구에서 활동하던 주보중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의 중국본토와 동북지방의 정치, 군사정세를 락관적으로 평가하면서 대사변은 이미 시작되였다, 대사변의 확대발전과 동시에 즉시 모든 가능성을 동원하여 빠른 속도로 열하지경에 진출하는 8로군 유격군과 직접 련계를 가져야 한다고 력설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부대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서정을 지지한것은 아니였습니다. 5군 부사령으로 있던 채세영은 처음부터 서정계획이 무모하다는것을 깨닫고 그 계획을 회의적으로 대하였다고 합니다.

위증민은 열하원정계획에 모험주의적요소가 있다는것을 알면서도 그 원정을 지지하는 립장에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중국혁명에 대한 위증민식의 충실성이라고 보았습니다.

위증민은 화북의 산서성출신이지만 1930년대초부터 만주에 들어와 동북혁명에 참가한 지도적인물의 한사람입니다. 그는 동북의 당사업과 항일련군건설에 심혼을 바치였으며 일제를 격멸소탕하는 군사작전에서도 큰 성과를 올리였습니다. 동북혁명에 대한 그의 애착과 관심은 보통정도가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위증민은 동북혁명에만 머물러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북혁명을 중국혁명의 한 부분으로 보았으며 지역혁명을 중시하면서도 전반적중국혁명발전에 대해서 언제나 관심하고있었습니다. 그는 전 중국혁명을 앙양시키는데 이바지할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희생도 감당해야 한다는 립장에 서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당신이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열하원정을 성사시키고싶어하는 심정에 대해서는 나도 리해한다, 그렇지만 나는 국제당이 원정에 대한 계획을 작성할 때 동북의 현실과 중국혁명의 요구를 정확히 반영하였는가 반영하지 않았는가, 그 계획의 군사적가능성여부를 정확히 타산하였는가 타산하지 않았는가, 더우기는 그들이 시도하는 원정이 유격전의 특성에 부합되는가 부합되지 않는가 하는데 대하여 심중하게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국제당이 시달한 열하원정계획에는 중국혁명의 현 실태에 대한 정확한 통찰이 부족할뿐아니라 조선혁명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고 할수 있다, 왕명이 국제당에 가서 중공당대표로 활동하고있지만 그 사람의 주관주의가 보통이 아닌것 같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왕명이 주관주의가 강한 사람이라는데 대해서는 위증민도 수긍하였습니다.

열하에로의 원정계획은 국제공산당의 지령으로 떨어졌지만 그것을 작성시달한 사람은 왕명이였다.

왕명은 모스크바에 가있으면서 중국의 실정에 맞지 않는 로선들을 계속 작성시달하였다. 왕명의 로선에서 주되는 병패는 《국제로선》이라는 미명하에 강요된 좌경이였다. 그러나 중일전쟁발발후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다음부터 그의 로선은 우경으로 떨어졌다. 그는 모든것을 국민당과의 합작과 통일전선을 통해서만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열하원정에 관한 지령을 조선혁명과 국제혁명과의 련관속에서 용의주도하고 령활하게 집행해나간데 대하여 아래와 같이 회고하시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우리는 왕명로선의 기회주의적본질을 속속들이 다 파악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설사 파악한다고 해도 그것을 정면으로 반대하거나 그 집행을 로골적으로 회피할수 없었습니다. 왕명은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 위원이였을뿐아니라 국제당비서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작성한 모든 지령은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국제당의 명의로 하달되는것이였습니다.

나는 열하원정계획이 중국 동북지방의 혁명운동발전에 리롭지 못할뿐아니라 조선혁명의 견지에서 볼 때에도 매우 일면적이고 해독적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집행에서는 신중성을 견지하였습니다.

우리는 위증민과 함께 1군산하의 항일련군부대들과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활동방향을 두고 진지한 토론을 하였습니다.

위증민은 우리 부대가 1군의 활동지역인 해룡, 길해선일대에로 나가주었으면 하였습니다. 그의 요구대로 한다면 우리는 백두산지구에서 달성한 군사정치적성과를 공고히 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절충안으로 우선 당분간은 림강, 무송, 몽강일대에서 류동작전을 벌리면서 조선혁명을 추진시키기 위한 정치군사활동을 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그쪽으로 서서히 움직이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부대에는 그 당시 서간도와 국내에서 입대한 신입대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을 충분히 훈련시키지 못한 조건에서 부대가 본래의 활동지역을 떠나 생소한 고장으로 자리를 옮기는것은 별로 좋은 일이 못되였습니다. 나는 국내에 꾸려진 혁명조직들을 보존확대하며 앞으로 국내진공을 더욱 적극화하기 위해서도 서간도와 백두산지구를 멀리 리탈하지 않겠다고 내놓고 말해주었습니다.

위증민은 나의 립장에 동의하였습니다.

그 당시 양정우는 중일전쟁의 발발로 급격히 앙양되는 항일기세를 리용하여 기어이 열하원정을 성사시켜보려고 악전고투하고있었습니다.

그러나 1938년 봄 1군의 부대들은 원정을 개시하자마자 포위속에서 고전을 겪었습니다. 그런데다가 1사사장 정빈이 부대를 데리고 적들에게 투항하는 비상사태까지 일어나 1군의 서정계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7월 중순에 양정우는 로령에서 1군 긴급간부회의를 소집하고 정식으로 서정계획을 취소하는 한편 군내비밀의 루설을 막기 위한 필요한 개편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정빈의 투항은 우리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자칫하다가는 1군이 와해될 우려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1군을 도와주기 위하여 무기와 군수물자들을 마련한 다음 일부 부대들로 하여금 몽강현을 에돌아 금천, 류하현을 거쳐 통화계선으로 부분적인 군사적이동을 시작하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이 군사적이동은 1군부대들을 포위하고있는 적의 력량을 분산시키고 1군의 전우들에게 포위를 돌파할 가능성을 주기 위한것이였습니다. 적의 력량을 분산시키는것은 원정계획을 어떻게 집행하는가 하는 문제에 앞서 1군의 전우들을 구출함으로써 동북항일력량을 보존하고 여러해동안의 공동투쟁을 통하여 맺어진 조중 두 나라 공산주의자들과 인민들사이의 전투적우의를 두터이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일부 부대들이 적들의 주의를 끌기 위하여 일부러 소리를 크게 내면서 통화계선으로 진격하고있을 때 나는 소부대를 데리고 은밀히 국내깊이 들어와 국내에서 혁명투쟁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새로운 대책을 세웠습니다.

한편 주력부대는 여러 방면에서 적들을 요정냈습니다. 그중에서 인상깊은 전투의 하나가 8도강부근의 도로공사장습격전투였습니다. 8도강에는 일본군, 위만군, 무장경찰대와 자위단을 비롯하여 많은 병력이 배치되여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 고장에 주둔하고있던 적들은 림강지구에서 활동하는 인민혁명군부대들에 대한 《토벌》에 자주 동원되는 한편 조선의 강계와 중강으로부터 림강을 거쳐 만주의 내륙지대로 통하는 군용도로와 철도부설공사를 대대적으로 벌리고있었습니다.

우리는 통화-림강사이에서 큰 공사장을 습격하여 삽시간에 수라장으로 만들어놓고 많은 경비병력을 소멸하였습니다.

전투가 끝난 다음 공사를 지휘하고있던 몇명의 일본인청부업자들이 나와의 회견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나를 만나자 몸값을 후하게 치를터이니 살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당신들이 지금 이 공사를 맡아하고있는것은 물론 일본의 침략행위를 돕는것으로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당신들을 해칠 생각이 없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몸값으로 돈을 내겠다고 하는데 혁명군은 그런 돈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마적들이나 할짓이다, 몸값은 내지 않아도 되니 돌아가라, 그러되 이 공사장에서는 손을 떼는것이 좋겠다, 청부업을 하겠거든 다른 청부업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려보내주었습니다.

우리가 공사장을 친 후 김일성빨찌산이 림강서부에 나왔다는 소문이 크게 났습니다. 일본인청부업자들이 돌아가서 우리에 대한 선전을 많이 한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후 계속하여 8도강, 외차구, 내차구일대에서 적을 소멸하고 이어 무송현 서강전투를 벌려 적들의 력량을 우리에게로 쏠리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령활한 전술적이동은 적들로 하여금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을 종잡을수 없어 여기저기 병력을 끌고다니며 전전긍긍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1군을 곤경에서 구출하려는 우리의 전술적이동과 일련의 작전적공세가 성공하였다는것을 의미합니다. 후에 양정우와 위증민도 림강, 무송, 몽강일대에서 우리가 울린 총소리가 1군의 어려운 처지를 개선하는데서 결정적인 도움으로 되였다고 거듭 말하였습니다.

북만의 항일련군부대들도 서정과정에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북만에서 활동하던 여러개의 군이 원정의 길에 처음으로 오른것은 1937년 7월이였고 본격화된것은 1938년이였습니다.

그러나 남만에서와 마찬가지로 북만에서의 원정도 결국은 실패하였습니다. 몇해동안 동북혁명에 혼선을 일으키고 무모한 전투와 희생을 강요하던 열하원정은 남만에서는 1938년에 그리고 북만에서는 1939년에 이르러 막을 내리였습니다.

그러면 많은 정력과 인력, 물력의 소모를 가져온 열하원정이 실패한 원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많은 연구자들이 열하원정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을 일만통치질서의 수립과 적력량의 압도적우세로부터 온 객관적조건에서 찾고있는데 그것은 옳은 분석이라고 봅니다.

이 시기 적들이 더욱 본격적으로 실시한 집단부락정책은 이른바 《비민분리》라는 말대로 유격대와 군중의 련계를 철저히 끊어놓았습니다. 이 정책은 일만통치질서를 공고히 하는 반면에 항일무장부대들의 활동에 많은 난관을 조성하였습니다. 이런 원인으로 하여 원정은 군중들과의 련계와 식량보급로가 거의나 단절된 조건에서 진행되였습니다. 집단부락에 갇힌 인민들은 원정부대들과 련계를 가지고싶어도 방법이 없었습니다. 원군물자의 지원 같은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원정부대들은 부득불 적을 쳐서 식량이나 천 같은 후방물자들을 해결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총소리를 내게 되니 원정부대들의 전략적이동에 대한 정보가 적들에게 시시로 알려지지 않을수 없게 되였습니다.

게다가 원정부대들앞에는 걸음마다 깊은 골짜기와 높은 포대, 험한 봉쇄선들과 병영들이 막아섰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원정이 실패한 원인을 객관적조건에서만 찾을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다 아는바와 같이 이 원정의 주체는 동북의 항일련군부대들입니다. 열하원정을 로선으로 내리먹인 국제당도 넓은 의미에서는 원정의 주체라고 할수 있습니다. 내 개인의 견해에 의하면 국제당은 로선작성과 지도에서 주관주의를 범하였고 항일련군부대들은 그 집행과 실천에서 맹목적이였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국제당의 주관주의와 모험주의가 원정을 실패에로 이끈 기본요인이였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대중에게 접수되지 않거나 심금을 울리지 못하는 로선은 훌륭한 결실을 기대할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정책이나 로선을 채택할 때 인민들속에 깊이 들어가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것은 주관주의를 범하지 않기 위한것입니다.

사람이 주관에만 사로잡히면 눈뜬 소경이 되고맙니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자기 생각만 자기 생각이라고 하면서 아래사람들의 의견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있는데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제갈량도 이름난 재사이기는 하지만 인민대중은 그보다 더 지혜롭고 현명합니다.

로선과 방략이란 만사람에게 그 정당성이 확인될 때 비로소 은을 내게 되는것입니다. 대중에게 접수되지 않는 로선과 방략이란 무용지물입니다. 대중은 정당하고 정확하고 투명한 로선을 위해서만 심장을 발동시키는 법입니다. 하물며 한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되는 군사작전의 경우에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열하원정이 무모한 작전이였다는데 대해서는 적들도 인정하였다.

《…그들은 사변후의 객관적정세가 저들의 유격행동에 유리한것처럼 경솔하게 생각하고 대담하게도 재작년(1938년) 가을경부터 작년 봄에 걸쳐 동변도… 금천, 류하, 림강 일부로 빠져서 화북의 열하진격군과 합류하려고 하는것 같은 대담한 행동에로 나오는 형세가 있었으나 너무나도 빠르게 일만군경의 토벌을 만나 다시 북상하여 화전, 몽강, 돈화, 교하, 무송, 안도 등의 현경 즉 백두산기슭의 백색지대를 중심으로 적구건설을 의도한것입니다.》(《사상월보》 제77호 사법성형사국 소화 15년(1940년) 11월 136~137페지)

국제당이 내린 지령들가운데는 현실에 부합되지 않는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번 그 지령들을 심중하게 대했으며 그것을 우리 혁명의 구체적실정과 결부시켜 리행하면서 국제적리익과 민족적리익이라는 량자를 옳게 결합시키기 위하여 용의주도하게 사색하고 령활하게 행동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혁명앞에 장벽이 가로놓이고 복잡한 정세가 조성될 때일수록 주체적립장을 더 확고히 견지하고 자주적으로 활동하는것은 우리의 일관한 원칙입니다. 국제당과의 관계에서도 그랬지만 우리는 주변에 있는 큰 나라들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자주성과 국제주의를 옳게 결합시켜나갔습니다.

우리가 오늘까지 갈지자로 걷지 않고 혁명을 곧바른 승리의 한길로 이끌어올수 있은것은 이런 요인때문이였다고도 할수 있습니다.

나는 오늘도 우리가 열하원정문제를 두고 취했던 립장과 행동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1970년 가을에 나는 중국을 비공식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중국측에서는 우리 당창건기념일을 축하하여 베이징에서 연회를 차리였습니다. 그 자리에는 왕명과 같이 국제당에 가있던 사람도 참가하였습니다.

나는 중국간부들에게 지난날 조선혁명이 주위의 압력으로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또 그 과정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누구보다도 큰 고뇌를 체험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사실에 대하여 말해주었습니다. 반《민생단》투쟁과정에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희생되였으며 특히 1930년대 후반기에는 일부 사람들이 국제당에 들어앉아 실정에 맞지 않는 로선을 강요하였기때문에 조선인민혁명군을 강화하고 전반적인 항일혁명을 발전시키는데서 큰 손실을 당하였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런 말을 하자 주은래가 그에 대한 책임은 왕명에게 있다고 하면서 그러고보면 왕명은 중국혁명에도 많은 손실을 주었지만 조선혁명발전에도 적지 않은 저해를 주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국제당이 주관주의적오유를 많이 범하였다는데 대해서는 쓰딸린도 인정하였습니다.

만일 국제당이 열하원정을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서간도를 떠나지 않았을것이고 서간도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혜산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제때에 수습하고 손실도 최대한으로 줄이였을것입니다. 우리 주력부대가 서간도에 그냥 있으면 적들이 우리의 혁명조직들에 손을 대고싶어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합니다. 설사 손을 댄다 하더라도 체포를 면한 사람들이 산에 들어와서 부대에 입대하면 피해를 당하지 않을수 있었습니다. 사실은 박달도 체포되지 않고 산으로 돌아다니였는데 우리와 제때에 접선하지 못하다나니 붙잡히였습니다.

열하원정이 있은 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내가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그 원정에 대하여 회상하는것은 어느것이 옳고그른가 하는 시비를 가르자는것이 아닙니다. 시비를 가른대야 제소할데도 없습니다. 이제는 국제당도 없고 그 무슨 지휘봉이라는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주관주의와 맹목성으로 하여 손실을 보았던 열하원정에서 심각한 교훈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력사는 혁명의 리치를 무시하고 주관주의를 부리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열매를 선사하지 않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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