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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

도 서

화 첩

기 타

머리글

제1권

제2권

제4장 새로운 진로를 탐색하던 나날에
(1930. 5-1930. 12)

1. 손정도목사

2. 준엄한 봄

3. 카륜회의

4. 첫 당조직-건설동지사

5. 조선혁명군

6. 혁명시인 김혁

7. 1930년 여름

8. 두만강을 건너

9. 《리상촌》을 혁명촌으로

10. 잊을수 없는 사람들

제5장 무장한 인민
(1931. 1-1932. 4)

제6장 시련의 해
(1932. 5-1933. 2)

제3권

제4권

제5권

제6권

제7권

제8권

처음|이전| 29/159 |다음|마지막



7. 1930년 여름

엠엘파계렬의 종파분자들은 5.30폭동의 실패에서 교훈을 찾을 대신 1930년 8월 1일 국제반전일을 전후하여 길돈철도연선지방을 중심으로 또다시 무모한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으로 하여 우리 혁명앞에는 엄중한 난관이 조성되였다. 5.30폭동후 지하에 깊숙이 들어가있던 얼마 되지 않은 조직들마저 적들앞에 로출되였다. 우리가 감옥에서 나와 사방으로 다니면서 가까스로 수습해놓았던 조직들도 재차 타격을 받고 파괴되였다. 만주각지에서 우수한 지도핵심들이 무리로 붙잡혀 처형되였다. 적들은 공산주의를 헐뜯고 공산주의운동을 탄압할수 있는 또 하나의 좋은 구실을 얻게 되였다.

이 폭동이 일제의 민족리간책동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가 하는것은 구태여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두차례의 폭동때문에 조선사람들이 중국사람들앞에서 그만 신용을 다 잃었다. 그후 우리는 유격투쟁을 통하여 그 신용을 힘들게 회복하였다.

동만의 조선사람들은 8.1폭동까지 겪고나서 좌경모험주의가 얼마나 위험한가 하는것을 점차 심각히 깨닫기 시작했으며 대중을 무모한 폭동에로 내모는 종파사대주의자들을 불신과 경계의 눈으로 보게 되였다.

우리는 지체없이 폭동이 휩쓴 지역들에 공작원들을 파견하여 혁명군중이 종파분자들의 선동에 더는 속아넘어가지 않도록 하였다.

나도 길림을 거쳐 돈화쪽에 가서 얼마동안 조직을 수습할 작정이였다.

길림에 가니 거기도 5.30폭동직후처럼 분위기가 이만저만 살벌하지 않았다.

나는 하루에도 몇차례씩 변장을 해가며 조직에 관계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였다.

길림의 역과 성문, 도로교차점들이 모두 적들의 검문초소로 되고있었다. 일본령사관 밀정들도 거리를 싸다니면서 조선혁명가들을 색출하였다. 민족주의운동이 막판으로 기울어지고있던 시기여서 적들도 이무렵에 와서는 안창호사건때와 같이 독립군령감들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고 공산주의운동을 하는 청년들을 잡으려고 곳곳에 그물을 쳤다.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으로 끓어번지던 길림시내에서 오늘은 낯익은 얼굴들을 찾아보기 힘들구나 하는 생각에 분하고 원통한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동무들은 나와 헤여질 때 길림에 들리더라도 오래 지체하지 말고 인차 해룡이나 청원 같은 곳으로 가라고 권고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길림을 쉽사리 떠날수는 없었다. 혁명을 새롭게 개척해보겠다고 만 3년동안이나 낮에 밤을 이어가며 심혈을 바치던 생각을 하면 다른 고장으로 선뜻 발길을 돌리게 되지 않았다. 내가 길림에서 감옥살이까지 하면서 혁명을 위해 고생하지 않았더라면 이 도시에 그처럼 큰 애착을 가지지 않았을수도 있었다. 사람은 자기가 심혼을 바친것만큼 그 고장을 사랑하는 법이다.

다행히도 공청사업을 하던 동무를 한명 만나 몇몇 조직성원들의 행처를 알아낼수 있었다. 그들을 한자리에 불러다놓고 적들앞에 조직성원들을 더는 로출시키지 말며 길림소년회나 류길학우회와 같은 합법적조직들도 당분간 지하로 들어가라고 지시하였다.

카륜회의방침을 실현하기 위한 대책도 의논하였다. 파악이 있는 동무들에게는 혁명조직들을 수습할데 대한 임무를 주어 활동지역들에 떠나보냈다.

나도 길림을 떠날 결심이였다. 내앞에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길림의 일을 대강 수습해놓고나니 동만쪽으로 나가면서 파괴된 조직들을 복구하고싶은 욕망이 불같이 일어났다.

나는 청원이나 해룡쪽에 가서 당분간 중국동무들의 집에 숨어있다가 적들의 피해를 많이 받은 고장들을 돌아다니며 폭동의 후과를 가셔볼 생각이였다. 해룡과 청원방면에 가면 카륜회의가 있은 후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최창걸이와도 련계를 가지고 그와 함께 남만으로 가는 통로도 개척할수 있을것이라고 타산하였다. 이 일대는 류하와 함께 최창걸의 활동구역이였다.

최창걸은 류하, 해룡, 청원일대를 왔다갔다 하면서 기층당조직을 내오고 공청과 반제청년동맹을 비롯한 여러가지 대중조직들을 확대해가고있었다. 당시 이 지역의 혁명운동은 국민부파와 반국민부파의 대결로 심한 진통을 겪고있었다. 그런 때에 8.1폭동의 여파까지 미쳐와 혁명조직들이 무더기로 파괴되였다.

해룡과 청원사이에는 내가 잘 아는 길림시절의 동창생이 한명 있었다. 유격대초창기 우리 부대에 있다가 남만원정이 있은 후 집으로 돌아간 중국동무였다. 그 동무의 집에 얼마동안 가있으면 그사이에 백색테로선풍도 좀 가라앉을것 같고 그러면 나도 위험한 고비를 무난히 넘길수 있을것 같았다.

길림을 떠나는 날 몇몇 녀동무들이 역에서 나를 전송하였다. 부자집 따님들처럼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나와 바래주다나니 나는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무난히 차에 오를수 있었다. 군벌들은 그때까지만 하여도 신사들이 공산주의운동 같은것은 하지 않는것으로 여기고있었다.

나는 그때 길림본역에서 차를 타지 않고 적들의 경계가 덜 미치는 변두리역에서 차에 올랐다. 그런데 차칸에서 뜻밖에도 장울화를 만났다.

장울화는 심양으로 공부하러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심양으로 가기 전에 혁명할 길이 없겠는가 의논하려고 나를 찾아 길림에 갔던것인데 가보니 살풍경이더라는것이였다. 《알만 한 조선사람들은 다 숨고 눈에 보이는것은 군경이 아니면 왜놈개들뿐이더라. 성주를 만나러 갔는데 만날수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 심양으로 가는 길이다.》 하면서 나를 다짜고짜 자기가 자리잡은 1등칸으로 데리고갔다. 그도 내가 테로를 피해 숨어다니는 몸이라는것을 짐작하고있은것 같았다.

그날따라 순사들은 승객들에 대한 단속을 심하게 하였다. 출입문이란 출입문은 모조리 봉쇄해놓고 차에 오르는 사람들의 신분을 일일이 조사하였으며 어떤 승객들에 대해서는 소지품과 보따리까지도 사정없이 뒤져보았다. 검표원들도 그날은 다른 때보다 류달리 엄격하게 차표조사를 하였다. 8.1폭동의 후유증이 도시나 촌락뿐아니라 렬차에까지 미치고있었다.

장울화의 도움으로 나는 해룡역까지 무사히 갈수 있었다. 순사들이 승객들에 대한 조사를 살벌하게 하였지만 중국신사복을 쭉 뽑아입은 장울화한테는 감히 말도 걸지 못하였다. 나도 장울화와 같이 앉아있다나니 순사들의 조사를 받지 않았다. 검표원들은 차표조사를 하면서도 우리한테는 차표를 요구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버리였다. 장울화의 배경때문이였을것이다.

내 품에는 그때 문건도 있었고 비밀자료들도 있었다. 경찰이 몸을 수색하게 되면 나도 무사할수 없었다.

해룡역에 도착하니 홈과 개찰구옆에 일본령사관 경찰들이 어마어마하게 진을 치고있는 광경이 보이였다. 나는 륙감으로 나에게 어떤 위험이 닥쳐왔다는것을 느꼈다.

해룡역에 있는 적이 일본경찰들이라고 생각하니 신경이 몹시 날카로와졌다. 중국의 순사나 일본순사나 다 같은 순사이지만 일본순사들에게 걸려들면 더 용수가 없었다. 만주에서 조선혁명가들을 붙잡기만 하면 사정없이 국내로 압송하거나 관동도독부법원들에서 재판을 하여 려순, 대련, 길림 등지에 있는 감옥들에 마구 잡아넣을 때였다.

내가 어떻게 할지 결심을 못하고 물끄러미 차창밖을 내다보고있을 때 장울화가 특별히 바쁜 일이 없으면 자기와 같이 가자고 하였다. 같이 가서 아버지도 만나보고 자기의 장래문제도 의논해보자는것이였다.

나는 원래 초시역에서 차를 내려 목적지까지 가려고 계획하였다. 초시역으로 가자면 다섯정거장인가 여섯정거장 더 가야 하였다. 장울화가 해룡역에서 내리게 되면 나를 보호해줄 사람이 없어지므로 뜻밖의 위험이 조성될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요청에 응하기로 하였다.

역에는 마침 장울화의 아버지가 나와있었다. 영구라는 곳에 가서 인삼을 팔고 돌아가는 길에 아들이 해룡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을 나왔다는것이였다. 허리에 목갑싸창을 찬 수십명의 가병들이 우리앞에 고급마차를 들이대였는데 행색이 여간 으리으리하지 않았다. 그통에 령사관경찰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감히 우리에게 접어들지 못하였다.

우리는 고급마차를 타고 가병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보란듯이 역전거리를 달리였다. 그날 나는 고급려관에 들어 장울화네와 함께 지내면서 휴식을 잘하였다.

장울화네는 보초도 자기네 가병들로 세웠다. 려관둘레에 가병들이 두겹세겹으로 어마어마하게 늘어서있었다.

장울화의 아버지는 오래간만에 만나니 반갑다고 하면서 나를 특별방에 안내해주고 좋은 음식을 연방 청하였다. 원래 그는 무송시절부터 나를 보면 여간 살틀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손님들이 누구인가고 물으면 롱삼아 양아들이라고 소개하였다. 처음에는 롱으로 그렇게 불렀는데 나중에는 진심을 가지고 양아들, 양아들 하였다.

나는 장울화가 큰 부자의 아들이라는것을 알면서도 무송에 있을 때부터 그와 가깝게 지냈다. 어려서부터 지주가 착취자라는 일반적인 관점을 가지고있었지만 장울화와의 관계에서는 그것때문에 구속을 받지 않았다. 사람이 어질고 량심적인데다가 반일감정이 강해서 거리를 두지 않고 가깝게 지냈는데 위급한 대목에서 도움을 받고보니 감개무량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평소에 지주의 아들이라고 장울화를 따돌리였더라면 그들이 결정적인 대목에서 나를 그처럼 성실하게 보호해주지 않았을것이다.

혁명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지지하지 않아도 일평생 호강하며 살수 있는 장울화와 같은 부자의 자식이 위급한 순간에 아버지와 힘을 합쳐 나를 도와준것은 그가 나와의 의리를 귀중하게 여겼기때문이였다.

내가 무송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부터 장울화는 자기와 나 사이에 부자와 가난한자, 중국사람과 조선사람이라는 간격을 두지 않고 친근하게 지냈다. 그는 나라를 강탈당한 우리의 설음을 누구보다도 깊이 리해하고 동정해주었으며 조국을 광복하려는 우리의 결의와 리상을 충심으로 지지해주었다. 장울화가 그렇게 한것은 그자신이 자기 조국과 중화민족을 열렬히 사랑하는 애국자였기때문이다. 그는 조선민족의 비운에서 중화민족의 불행을 보았다.

장울화의 아버지도 부자이지만 외세를 배격하고 민족의 자주권을 주장하는 지조가 강한 애국자였다. 그의 애국충정은 그가 지은 자식들의 이름에도 그대로 반영되여있다. 그는 맏아들이 태여나자 울중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울중의 두번째 글자 《중》은 《중화민국》이라는 중국의 국호에서 첫 글자를 따온것이였다. 둘째한테는 울화, 셋째한테는 울민이라는 이름을 련이어 지어주었으며 넷째가 태여나면 울국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 넷째는 출생하지 않았다. 네 이름의 두번째 글자를 합치면 《중화민국》이라는 국호가 된다.

장울화는 그때 나에게 명년 봄이나 가을쯤에는 일제놈들이 쳐들어올것 같은데 일제놈들이 들어오면 어떻게 할 작정인가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일제놈들이 들어오면 맞받아나가 싸우려고 한다. 무장투쟁을 하자는것이다.》라고 말해주었다.

장울화는 자기도 투쟁을 하기는 하여야겠는데 집에서 허락하겠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하였다.

그래서 나는 말해주었다.

《나라가 없어지는데 집이 다 무엇이냐. 너도 낡은 사회를 반대하여 싸우기로 마음먹었으면 혁명을 해야 한다. 인제 다른 출로라는것은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우국지사로 공산주의에 대한 말이나 하고 집에 앉아서 책이나 보는것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이 두길밖에는 없다. 그러니 부모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혁명을 해야 한다. 그것이 중국을 위한 길이고 중화민족을 구원하는 길이다. 너야 다른것이 있니. 중국사람들과 같이 혁명을 해야지. 일제놈들이 쳐들어오면 그때에는 조선사람들뿐아니라 중국사람들도 같이 들고일어날것이다.》

이렇게 그 려관에 2~3일간 묵으면서 장울화에게 반일사상을 불어넣었다. 장울화는 나의 권고를 듣고나서 학교를 마치면 자기도 혁명을 하겠노라고 하였다.

나는 그에게 《내가 정 바쁘면 너의 신세를 또 질수 있으니까 심양 어디에 가있겠는지 주소나 하나 적어달라.》고 하여 그의 심양주소를 받았다. 그런 다음 목적지까지 무사히 빠질수 있도록 나를 도와줄수 없겠는가고 하였다.

장울화는 너를 돕고 보호해주는 일이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고 하면서 나를 자기네 마차에 태워 해룡현과 청원현의 경계에 있는 중국동무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내가 찾아간 그 동무의 집도 역시 장울화네와 같이 잘사는 집이였다. 중국혁명의 선각자들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중국혁명이라는것이 특이한 혁명이였다고 늘 생각하게 된다. 로동계급이나 농민과 함께 인테리들, 돈냥이나 있는 사람들도 혁명운동, 공산주의운동에 많이 참가하였다.

부유한 가정출신의 사람들도 인간의 자주성과 사회발전을 억제하는 모순점들을 발견하게 되면 그 모순을 제거하기 위한 혁명운동에 참가할 각오를 가질수 있다. 자산가출신들가운데서 근로대중의 리익을 옹호하여 싸우는 투사나 선각자들이 배출되는것은 그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출신이 아니라 세계관에 있다.

인생을 하나의 도락이라고 보게 되면 혁명을 못하고 부를 누리는것으로 그치고말며 도락을 못 누려도 사람답게 사는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게 되면 부자도 혁명에 참가하게 되는것이다.

계급혁명이라고 하여 이런 선각자들을 다 따돌리게 되면 혁명 그자체가 큰 손실을 보게 된다.

나는 중국동무의 집에서 며칠간 묵었는데 그 동무도 장울화처럼 나를 잘 대해주었다. 그 동무의 성이 왕가였던지 위가였던지 지금은 기억에 삭막하다. 그 사람을 내세워 며칠동안 최창걸을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최창걸은 8.1폭동이 일어난 다음 지하로 깊숙이 들어갔다고 하였다.

나는 초시부근의 공청원을 한명 만나 해룡과 청원일대에서 파괴된 조직들을 속히 복구하고 무장투쟁준비를 적극 다그치라는 부탁이 담긴 편지를 주어 최창걸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중국동무의 집에서 며칠동안 손님대접을 받으면서 지내보니 그것도 갑갑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였다. 신변에 위험이 조성되더라도 대지를 마음껏 밟으며 자유분방한 활동에 몸을 잠그고싶어 견딜수 없었다. 공작을 위해서 또다시 변장을 하고 활동을 해야겠는데 서뿔리 하다가는 재미가 없을것 같았다. 길림에 다시 돌아가기도 어렵고 또 남만철도는 일제놈들이 주관하고있어 기차를 타는것도 용이한 일은 아니였다. 간도에 가고싶었으나 공산당검거선풍이 불어치는 그런 고장에 가서 견딜수 있을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어떻게 하든지 동만에 나가서 무장투쟁준비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나는 중국동무와 함께 해룡에서 기차를 타고 길림까지 갔다가 거기서 다시 기차를 타고 교하라는 곳으로 떠났다. 교하에는 우리의 영향하에 있는 조직들이 많았다. 길림시절부터 나와 친교를 맺어온 한영애와 그의 삼촌 한광도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당분간 군벌의 추적을 모면할수 있는 은신처도 꾸리고 조직을 복구정비하는 사업도 벌릴 작정이였다. 한영애를 만나면 할빈에 있는 국제공청산하 상급조직과의 련계도 지으려고 생각하였다.

한영애는 1929년초에 가정사정으로 길림에서 학교를 중퇴한 후에도 교하에 돌아와서 계속 우리와의 련계를 끊지 않고있었다.

나는 누구부터 찾아가야 할지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독립군시절에 중대장을 하던 장철호한테 먼저 들리였다.

국민부가 나온 후 독립군의 상층과 결별하고 군복을 벗어던진 그는 교하에 내려와서 정미소를 차려놓고 영업에 몰두하고있었다. 내가 그를 찾아간것은 그가 우리 아버지의 친구로서 나를 무척 사랑해주던 사람이고 믿음이 가는 애국지사였기때문이였다. 나에게는 조직성원을 만날 때까지 림시로 몸을 붙이고 지낼수 있는 생활거처가 필요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왔다고 몹시 반가와하면서도 집에 숨어있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좀 겁을 먹고있는것 같은 눈치이기에 나도 찾아온 사유를 털어놓지 않았다. 나는 리재순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발길을 돌리였다. 아버지가 생존해계실 때까지만 하여도 려관업을 하면서 독립운동자들을 잘 후원해주던 사람이였다. 그도 역시 나를 반갑게 맞아주기는 하였지만 중국음식점에 데리고 가서 교즈 한그릇을 사먹이고나서는 갈라지자고 하였다.

그 당시 나에게는 한두끼의 식사보다도 숨어있을만 한 거처가 더 필요하였다. 그 사람도 내가 찾아왔으면 그런 눈치를 모를리 없건만 하루밤 집에서 자고 가라는 말도 없이 그저 잘 가라고만 하였다. 그 사람은 벌써 자기에게 화가 미칠것부터 먼저 생각하고 지난날의 의리나 친분관계는 다 저버리였던것이다.

여기서 나는 하나의 심각한 교훈을 얻게 되였다. 사상적결합이 아니고서는 아버지의 친구도 다 소용없다, 지난날의 친분관계나 인정만 가지고서는 혁명투쟁을 함께 해나갈수 없다는것이 그때에 얻은 뼈저린 교훈이였다.

사상이 변하고 신념만 변하면 의리나 인정도 동시에 변하는 법이다. 지난날 죽자살자 하면서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사이에 틈이 생기고 인간적결렬이 생기게 되는것도 다 어느 한쪽의 사상이 변하는데서 오는것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장담하던 우정이나 동지적뉴대도 어느 일방이 사상적으로 변질되면 금이 가기마련이다. 사상을 고수하지 않고서는 의리나 친분관계도 지켜낼수가 없다는것이 그후 장구한 혁명투쟁과정을 통하여 내가 얻은 하나의 교훈이다.

리재순과 헤여진 나는 한광의 집으로 발길을 돌리였다. 한광은 어데 피신했을수 있지만 한영애는 녀자이기때문에 집에 있지 않겠는가, 그가 내 형편을 알기만 하면 목숨을 내대고 도와줄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가 들었다.

그러나 집에는 한광도 없고 한영애도 없었다. 그 옆집아주머니에게 행처를 물어보았더니 알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청년들중에서 운동이나 좀 한다고 하던 사람들은 다 숨어버렸으니 이제는 찾아갈데도 없게 되였다.

그러는 사이에 누가 고자질했는지 경찰들이 막 뒤쫓아오고있었다. 이제는 잡혔구나 하고 내자신도 사태를 아주 절망적으로 판단한 그 순간에 한광의 옆집녀자가 그래도 나를 위험에서 구원해주었다. 그 아주머니는 나에게 《누구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변이 위험한것 같은데 어서 부엌으로 들어오십시오.》하면서 자기가 업고있던 아이를 재빨리 업혀주었다. 그리고는 《대답은 내가 다할테니까 선생님은 가만히 앉아서 불이나 때십시오.》라고 하였다. 아마 그 당시의 내가 아이아버지처럼 위장해도 일없으리만큼 나이보다 퍼그나 숙성했던 모양이였다.

나는 등에 아이를 업은채 부지깽이를 들고 부엌봉당에 앉아 그 녀자가 시키는 역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혁명을 하면서 어려운 고비도 많이 겪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위험한 순간도 적지 않게 겪어보았지만 이런 경우는 난생 처음으로 당해보았다.

경찰들은 문을 열어제끼고 주인아주머니에게 《방금 이리로 온 청년이 어디로 갔는가?》고 물었다.

그 녀자는 《청년이라니, 어떤 청년말입니까? 우리 집에는 아무도 온 사람이 없습니다.》 하고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그런 다음 중국말로 넌지시 아무도 없으니 들어와서 밥이나 자시겠으면 자시라고 하였다.

등에 업힌 아이는 낯이 설다고 자꾸만 울었다. 그 아이를 달래기는 달래야겠는데 서투르게 달래다가는 정체가 드러날것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부지깽이로 아궁이만 뒤적거렸다.

경찰은 어디로 뛰였을가, 잘못 보지 않았는가고 저희들끼리 떠벌이다가 다른 집으로 가버렸다.

그들이 사라진 다음 아주머니는 태연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경찰들이 마을에서 떠나갈 때까지 〈주인〉노릇을 더해주십시오. 우리 주인이 밭에 나가있는데 들어오라고 알리겠으니 마음놓고있다가 그이가 온 다음 함께 대책을 의논해봅시다.》 그리고는 나에게 밥을 차려주고 밭에 나갔다 들어왔다.

얼마후 경찰들이 다시 나타나서 나더러 심부름을 시킬것이 있으니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그 아주머니는 침착하게 《앓는 사람이 어떻게 심부름을 가겠습니까. 정 바쁜 일이라면 내가 대신 갔다 오지요.》 하고는 나 대신 놈들이 시키는 심부름을 다 들어주고 돌아왔다.

이처럼 나는 그 녀자의 도움으로 아슬아슬한 고비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소박한 촌녀성이였지만 참으로 기발하고 지혜가 있었다. 혁명의식도 상당히 높은 녀성이였다.

나는 이 이름모를 녀인의 모습에서 지울수 없는 인상을 받았다. 지난날의 친분관계를 믿고 찾아갔던 아버지의 친구들보다는 그래도 생판 모르는 그 아주머니가 생사를 가리지 않고 나를 도와주었다. 오로지 혁명가를 돕는다는 순수한 감정을 가지고 그처럼 희생적으로 나를 위기에서 구원해준것이다. 사람이란 어려운 때에 그 진가를 알아볼수 있다.

혁명을 하는 사람들이 생명까지도 서슴지 않고 의탁할수 있는 결백하고 견실한 의리는 역시 근로하는 인민들속에 있었다. 그러기에 나는 늘 전우들에게 혁명을 하다가 곤난한 일이 생기면 인민을 찾아가라고 하였다. 배고파도 인민을 찾아가고 물을 먹고싶어도 인민을 찾아가며 슬픈 일이 생겨도 인민을 찾아가라고 하였다.

그 아주머니가 좋은 아주머니였다. 지금이라도 살아있으면 그에게 절을 하고싶은 심정이다.

그해 겨울 만주지방에서 활동하는 조선혁명군 지휘성원들과 지하조직책임자들이 오가자에 모여 회의를 할 때 나는 그 녀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동무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하여튼 성주동무는 운이 좋아. 운이 좋으니까 하늘이 도운거지.》 하였다.

나는 운이 좋아서 내가 봉변을 면한것이 아니라 인민이 좋아서 군벌에게 잡히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인민이 하늘이고 민심이 천심이더라고 말하였다. 그때부터 《교하의 아주머니》라는 말은 슬기롭고 희생적인 우리 인민을 상징하는 하나의 대명사, 어려운 고비에서 자기를 희생시켜 혁명가를 도와주는것이 체질로 되여있는 녀성들을 상징하는 뜻깊은 대명사로 되였다.

나는 지금도 폭양에 그슬리고 피로 얼룩지던 1930년 여름을 회상할 때마다 교하를 생각하고 잊을수 없는 교하의 아주머니를 그려보군 한다. 수십년을 두고 아무리 수소문해도 종적을 찾을수 없는 그 녀인을 회고할 때면 60년전 그날 그 아주머니의 이름도 묻지 못하고 홀연히 교하땅을 떠난 실수를 두고 가슴아픈 자책에 잠기군 한다.

그때 이름이라도 알아두었더라면 온 세상에 광고라도 낼수 있지 않겠는가.

해방후 지금까지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하여 많은 은인들이 나를 찾아왔다. 이역에서 살다가 헤여진지 반세기만에 백발로인으로 나타난 은인들도 있었다. 어려운 때에 나를 도와준 적지 않은 은인들이 나를 만났고 해방된 조국땅에 돌아와서 고맙다는 나의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교하의 그 아주머니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그 아주머니자신은 1930년 여름에 있었던 극적인 순간을 범상한 일로 여기고 그것을 죄다 망각해버렸는지도 모른다.

60년전의 은인은 아무런 소식도 자취도 없이 대지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좋은 옥일수록 땅속에 깊이 묻히는 법이다.

밭에 나갔던 남편이 돌아온 후에야 아주머니는 나에게서 아이를 받아내리였다. 그때의 일은 그 하나하나가 다 그대로 탐정소설 같은 이야기이다.

나는 내 이름을 제대로 대줄수가 없어 가명을 대고 그저 혁명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주인과 인사를 나누었다.

주인은 자기도 혁명을 하던 사람인데 조직과의 련계가 끊어져 속수무책으로 있다고 하면서 앞집에 큰개(밀정)가 있으니 주의해야겠다고 하였다. 그의 말이 한광은 북만으로 뛰고 한영애는 탄압이 심하여 늘 피해다니는데 지금 그를 만나기는 매우 어려울것 같다는것이였다.

그런 말까지 듣고나니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앞집에 밀정이 있으면 이 집에 그냥 머물러있을수도 없었다. 집에 숨어있다가 정세를 봐가며 다시 돈화쪽으로 가면 좋겠지만 돈화라는 곳이 일본인들이 거점을 두고있는 고장인데다가 공산당 화요파본부가 있던 곳이여서 수색이 심했다. 어지간한 조선사람들은 벌써 5.30폭동직후에 거의다 검거되고 녀자들밖에 없었다. 그런 고장에 가서 발을 붙일수 있겠는가 하는것이 문제였다.

나는 어두워진 다음 그 주인의 안내로 교하시내에서 15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외딴 초막으로 갔다. 이 집 로인부처가 또한 매우 친절한분들이였다.

이날 밤 나는 우리 혁명가들이 언제나 믿고 의지할 곳은 인민들밖에 없다는것을 다시금 절실히 느끼였다.

밤에 잠자리에 누우니 잠은 오지 않고 별의별 생각이 다 났다. 만나야 할 사람은 한명도 찾지 못하고 며칠째 줄곧 헛물만 켜고있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꼴인가, 이런 때일수록 피동에 빠지지 말고 역경을 헤쳐나가야 한다, 수세에 빠지면 끝장이다, 그래도 활동을 해야지 이런데 숨어다니기만 해서야 무슨 일이 되겠는가, 어떤 방법을 써서든지 이 고비를 잘 넘기고 동만에 나가 혁명을 추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날이 밝은 다음 뜻밖에도 한영애가 그 집에 나타났다. 내가 동만지방으로 나온다는 통보를 받은 한영애는 은신처를 찾아 집을 나설 때 오른쪽볼에 보조개가 있는분이 오면 자기가 숨어있는 곳에 련락해달라고 어머니에게 부탁하였다는것이다. 우리로서는 1년만에 만나는 셈이였다.

고생끝에 그를 만나고보니 어떻게 반가왔던지 한동안은 말도 못하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기만 하였다. 한번 웃기 시작하면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통쾌하게 깔깔거리군 하던 그의 얼굴이 한해사이에 살이 빠져 몰라보게 되였다.

한영애의 말을 들어보면 간도도 살풍경이라고 하였다.

나는 한영애에게 《이렇게 숨어있는거야 무골충이지. 그래도 어떻게 운동을 해야 되지 않겠소. 일제놈들이 당장 쳐들어오겠는데 가만히 앉아있지 말고 일어나서 그놈들과 싸울 준비를 해야 하겠소. 조직들을 빨리 수습하고 인민들을 각성시켜야 하오. 그저 무섭다고 숨어서 떨기만 할수야 없지 않소.》라고 하였다.

한영애는 자기도 같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어려운 때에 그런 말을 들으니 용기가 난다고 하였다.

《아무도 없는 여기에 앉아있어서는 방법이 없소. 조직과의 련계를 지어줄터이니 할빈으로 가기요.》

한영애는 조직과의 련계가 끊어져 어떻게 할바를 모르고 헤덤비고있었는데 마침 잘되였다고 하면서 기뻐하였다.

국제당과의 련계를 짓기 위하여 김혁을 할빈에 파견하였지만 나는 그가 돌아와서 활동결과를 보고하기 전에 내자신이 할빈에 빨리 가서 국제당사람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폭동으로 여지없이 파괴된 조직들과 계엄상태와도 같이 무시무시한 긴장감에 짓눌린 도시와 농촌마을의 풍경은 나로 하여금 좌경모험주의자들이 혁명에 끼친 해독이 얼마나 엄중한가 하는것을 다시한번 통절히 느끼게 하였으며 그것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1930년대의 첫출발에서부터 우리 혁명이 불가피하게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되리라는것을 명백히 깨닫게 해주었다.

리론투쟁만으로써는 종파사대주의자들과 좌경모험주의자들의 망동을 저지시킬수 없었다. 그들은 우리가 리치에 맞는 말을 하거나 혁명에 리로운 말을 해도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의 의사를 아예 리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5.30폭동의 연장선우에서 우리가 그처럼 우려하던 8.1폭동이 끝끝내 폭발한것은 그들이 길동지구당회의에서 우리가 내놓은 의견을 전면적으로 묵살해버렸다는것을 의미하였다.

만주대지에서 거침없이 굴러가는 좌경모험주의의 수레바퀴를 멈춰세우자면 국제당의 방조가 필요하였다.

나는 폭동에 대한 국제당의 견해를 알고싶었고 그것이 국제당의 지령에 의한것인가, 아니면 일부 사람들이 제멋대로 생각해낸 망동인가를 확인하고싶었다. 만일 국제당이 그런 지령을 내렸다면 론쟁을 해서라도 그 수레바퀴를 멈춰세우고싶었다.

우리는 적들의 경계가 심한 조건에서 둘 다 중국사람으로 변장하고 차를 타기로 하였다.

그날 한영애는 진종일 교하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우리들이 입고갈 신사옷과 신발을 준비하고 려비를 마련하였다. 군경들의 의심을 덜 받기 위하여 트렁크에는 화장품도 넣었다. 그의 도움으로 할빈까지 무사히 갈수 있었다.

나는 할빈부두가의 상부가입구에 있는 국제당련락소에 찾아가 련계를 맺고 그곳 사람들에게 한영애를 소개한 다음 5.30폭동과 8.1폭동으로 하여 동만에 조성된 사태에 대하여 통보하고 카륜회의정형을 소개하였다.

국제당련락소에서도 두차례의 폭동에 대해서는 모험주의라고 평가하였다. 련락소에서 나를 만나준 사람은 자기 견해로 볼 때에는 카륜회의에서 우리가 채택한 결정들이 다 조선의 실정에 맞고 혁명의 원칙에도 부합된다고 생각하는데 맑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대하려는 우리의 립장은 고무적인것이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카륜회의에서 새로운 당창건방침을 내놓고 그 모체로 되는 기층당조직으로 건설동지사를 내온것에 대해서도 그는 1국1당제원칙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언명하였다.

이렇게 되여 나는 국제당으로부터 우리 혁명의 생명으로 되는 자주성의 원칙, 창조성의 원칙, 우리가 내세운 모든 로선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때 국제당에서는 나에게 모스크바에 자기네가 운영하는 공산대학이 있는데 거기에 류학을 갈 생각이 없는가고 물었다.

나도 모스크바에 그런 대학이 있다는것과 우리 나라에서도 조선공산당의 추천을 받아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청년들이 그 대학에 가서 공부한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조봉암, 박헌영, 김용범과 같은 사람들도 이 대학을 다니였다. 모스크바류학에 대한 동경심이 얼마나 강했던지 그 당시 만주지방 청년들속에서는 《모스크바류학가》라는 노래까지 불리워지고있었다.

나는 혁명실천에서 떨어지고싶은 생각이 없었기때문에 《가고는 싶어도 지금은 갈 형편이 못된다.》고 대답하였다.

1989년에 문익환목사를 만나 여담으로 할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는 자기 아버지도 그무렵에 할빈에서 국제당이 선발한 류학생들을 쏘련에 넘겨보내는 일을 했다고 하였다.

국제당에서는 나에게 길동지구 공청책임비서사업을 위임하였다.

김혁이 3층집에서 떨어져 감옥으로 끌려갔다는 소식도 우리는 국제당련락소를 통하여 입수하였다.

김혁의 체포때문에 나와 한영애는 할빈에 체류하는 기간 내내 침통한 기분으로 지냈다. 김혁이 철쇄에 묶인것이 너무도 애석하여 한번은 그가 떨어졌다는 도리의 3층집앞에 가보기까지 하였다.

도리의 상점과 식당들에는 기름진 음식들이 많았으나 우리한테는 그것이 다 그림의 떡이였다.

국제당에서는 하루용돈으로 15전을 주었는데 할빈생활이라는것이 15전을 가지고서는 어림도 없었다. 보통려관에 들면 숙박검열이 심하여 혁명가들이 배겨있을수 없었다. 경관들이 드나들지도 않고 숙박계도 내지 않는 려관이란 백계로씨야인들이 경영하는 려관밖에 없었다. 이 려관에서는 식비와 숙박비를 엄청나게 많이 받았다. 돈많은 자본가들이나 들었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명함을 들이대기도 어려운 호화려관이였다. 나는 여러가지로 타산하던 끝에 하루 한끼씩 먹는 한이 있더라도 안전한 고급려관에 들기로 하고 녀성들에 대한 단속을 별반 하지 않는 일반려관에 한영애를 들게 하였다.

려관에 들고보니 그 내부가 이만저만 요란하지 않았다. 려관에는 상점, 식당, 오락장, 딴스홀 같은 시설은 물론, 영화관까지 있었다.

나는 돈도 없이 이 려관에 거처를 정했다가 딱한 경우를 여러번 당하였다. 내가 첫날 려관에 들어갔을 때 로씨야안내원녀자가 따라들어와서 손톱을 깎아주겠다고 하였다. 손톱을 깎으면 돈을 물어주어야 하겠으므로 나는 다 깎았다고 하였다. 안내원이 나가자 이번에는 접대원이 꼬리를 물고 따라들어와서 어떤 음식을 청하겠는가고 물었다. 궁색한대로 또 동무의 집에서 먹고 왔다고 대답하는수밖에 없었다.

이런 단련을 날마다 받으면서도 돈이 없는탓으로 려관에서는 식사를 한번도 하지 않고 자기만 하였다. 식사는 하루일을 다 보고 저녁에 한영애와 함께 거리에 나가 눅거리강낭지짐을 한두점 사먹는것으로 굼때였다.

언제인가 우리 나라에 온 류소기를 만나 그 사연을 이야기했더니 그는 자기도 그해에 할빈에 있은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당원들중에 중국사람은 없고 조선공산당원 몇사람을 데리고있었는데 그때 내가 국제당에 관계하지 않았는가고 하였다. 시기를 따져보면 류소기가 할빈에서 활동하다가 돌아간 직후에 내가 거기에 가서 국제당일군들을 만난것 같다.

나는 한영애에게 과업을 주어 흩어진 조직성원들을 찾도록 하였다.

한영애는 길림시절부터 련계를 가지고있던 할빈공청지부의 한 아무개라는 사람과 련계를 가지고 그를 통하여 지하에 숨어있는 조직성원들을 한명두명 찾아내여 카륜회의방침을 해설하였다.

나도 김혁이 공작하던 철도와 항만에 들어가서 혁명조직의 영향밑에 있는 로동자들을 만났다. 이렇게 할빈에서 지하조직들을 수습하고 동지들사이에 서로 련계를 지어준 다음 한영애를 그곳에 남겨두고 혼자서 돈화로 나왔다. 분초를 다투는 때여서 한영애 하고는 고맙다는 인사도 변변히 하지 못하고 헤여졌다. 내가 떠날 때 한영애는 함께 따라가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할빈동무들이 자꾸 남겨두고 가라고 해서 그의 소원을 풀어줄수가 없었다. 동만에 나온 후 그것이 늘 속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지만 지하공작규률상 편지련락을 못하게 되여 서로 소식도 모르고 지냈다.

한영애의 그후 운명에 대해서는 당력사연구소동무들이 수집한 자료를 보고 훨씬 후에야 알게 되였다.

내가 돈화로 나올 때 할빈의 혁명조직들에 서한을 남긴것이 있는데 한영애는 그 서한을 통해 내가 할빈동무들에게 준 과업을 실행하느라고 뛰여다니다가 1930년 가을에 경찰에 체포되였다. 어지간한 녀성들 같으면 집이 그리워서라도 교하로 돌아갔겠지만 한영애는 할빈에 그냥 남아서 밤잠도 자지 않고 내가 준 과업을 수행하였다. 말이 적고 양순한 처녀였지만 일단 혁명사업에 들어가면 이악하고 과감하게 활동하였다.

한영애는 붙잡히자마자 신의주감옥으로 끌려가 거기서 수감생활을 하였다. 그것은 리종락, 박차석을 비롯한 《ㅌ.ㄷ》시절의 연고자들이 무리로 붙잡혀 감옥으로 끌려가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는 리종락이와도 한감옥에 있게 되였다.

그후 리종락이 한영애를 만난 자리에서 《나도 김성주와는 잘 아는 사이이고 너도 김성주의 지도를 받던 녀자이니 우리 다같이 힘을 합쳐 그를 귀순시켜보지 않겠는가. 생각이 있으면 우리 〈귀순공작대〉에 들어오라.》고 하였다.

한영애는 즉석에서 그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는 리종락에게 그런 행동을 하면 못쓴다, 우리가 김성주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그따위 너절한 배신행위를 하겠는가, 출옥한 다음 혁명을 못하면 말았지 그따위짓은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1938년 겨울 우리가 남패자에서 회의를 할 때 나를 《귀순》시켜보려고 회의장소에 들어왔던 리종락이 이런 사연을 다 고백하였다.

그렇게 되여 나는 그동안 어디서도 들을수 없었던 한영애의 소식을 듣게 되였으며 그가 감옥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혁명가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리종락이나 박차석 같은 사내들은 감옥맛을 보기 바쁘게 다 전향문에 도장을 찍었지만 한영애는 녀성의 몸으로 그 고초를 용감하게 이겨냈다.

《혜산사건》이후 도처에서 혁명가들이 무리로 잡혀가고 투쟁의 길을 걷던 사람들가운데서 배신자들이 생겨 혁명에 엄중한 손실을 주고있던 때에 그런 소식을 들은것만큼 나로서는 무척 감동도 되고 고무도 받았다.

한영애는 중국 단동시에 있는 고무공장에서 제화로동도 하였다. 그는 로동을 하면서도 동포들에게 길림시절에 부르던 혁명가요를 보급하였으며 로동자들의 권익을 지켜 여러가지 요구조건을 내걸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로 사람들을 힘있게 불러일으켰다.

한영애는 그후 서울에 나가 몇해동안 홍명희선생의 아들집에서 처녀시절을 보냈다.

그는 조직선을 찾아 다시 만주로 들어가려고 여러해동안 모대기다가 늦게야 결혼하였다. 비록 머리를 쪽지고 가정에 묻히는 몸이 되기는 하였으나 우리와 함께 혁명을 하느라고 뛰여다니던 그 시절의 량심과 지조를 조금도 저버리지 않았다. 우리가 무장을 들고 백두산일대에서 적들을 한창 답새기고있을 때 한영애는 서울에서 그 소식을 듣고 길림시절의 동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마음속으로 우리의 승리를 빌었다고 한다.

그의 남편은 해방후 남로당원으로 지하활동을 하였는데 후퇴시기 적들에게 피살되였다.

한영애도 전쟁시기 서울근처에서 녀맹조직을 책임지고 전선원호사업을 잘하였다. 남편이 피살된 후에는 나를 찾아간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평양에 들어왔다. 그러나 나를 만나지도 못하고 1951년 8월 14일 밤 적의 폭격에 두 아이와 함께 애석하게도 희생되였다.

나는 한영애가 일생을 깨끗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길림시절의 호흡과 발걸음으로 전 생애를 살아왔다. 노래를 불러도 길림시절의 노래를 불렀다.

혁명을 하는 사람들은 한영애와 같이 절해고도에서도 신념을 잃지 말고 량심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나의 일생에서는 한영애도 잊을수 없는 은인이였다. 그는 어려운 때에 나를 찾아와서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준 고마운 녀성이였다.

해방이 되여 조국에 돌아와 한영애의 행처를 수소문하니 그는 공화국경내에 없었다.

해방전에는 항일전쟁을 하느라고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나의 변장에 필요한 중국옷을 얻느라고 땀을 철철 흘리며 무더위속을 뛰여다니던 일과 렬차에서 군벌들의 조사를 받을 때마다 림기응변으로 위험한 순간순간들을 모면하면서 내 신변을 보호해주던 일, 한점의 지짐떡을 먹으면서도 매번 그것을 절반으로 갈라서는 그중 한쪽을 내앞에 조용히 밀어놓군 하던 일들을 나는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가 나를 위해 한 모든 봉사는 사랑이나 련정과 같은 감정을 훨씬 초월한 깨끗하고 사심없는 동지애의 산물이였다.

그가 평양까지 들어왔다가 나를 만나보지 못하고 폭격에 희생된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애석한 심정을 금할수 없다.

다행히도 젊은 시절의 그의 사진이 기적적으로 보존되여 내 손에까지 들어왔다. 이 세상에 없는 은인들생각이 가슴에 차오를 때면 나는 나의 청춘시절에 큰 자국을 남긴 한영애의 아름다운 넋을 사진에서 찾으며 마음속으로 감사를 드리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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