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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

도 서

화 첩

기 타

머리글

제1권

제2권

제3권

제7장 인민의 세상
(1933. 2-1934. 2)

제8장 반일의 기치높이
(1934.2-1934.10)

제9장 제1차 북만원정
(1934.10-1935.2)

1. 조선인민혁명군

2. 부자와 가난뱅이

3. 로야령을 넘어

4. 녕안땅에 울린 하모니카소리

5. 천교령의 눈보라

6. 인민의 품

제4권

제5권

제6권

제7권

제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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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자와 가난뱅이

유격근거지가 우리의 집이고 보금자리인것은 틀림없었으나 나는 사실상 거기에만 있은것은 아니였다.

군대가 울타리속에만 갇혀있는것은 전술상으로 자멸을 가져오는 길이였다.

인민들이 주는 밥을 축내면서 소왕청골안을 빈둥빈둥 돌아다니는것은 우리의 배짱에도 맞지 않았다. 멀쩡한 자기편 사람들을 《민생단》으로 몰아죽이는 좌경분자들과 민족배타주의자들의 처사도 혐오감을 자아내였다.

나는 짬만 있으면 군대를 데리고 적구로 나갔다. 반유격구를 꾸려놓은 다음에는 더 자주 나가 돌아다니였다.

군대가 적구로 나가는데 대해서는 인민들도 좋아하였다. 적구활동을 해야 쌀도 생기고 천도 생긴다는것을 잘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적들이 아무리 공산주의가 나쁘다고 선전하여도 우리가 하루밤 자고가면 다 허사가 되였다. 인민들은 적들이 내돌리는 소문보다도 우리의 도덕과 례절에 체현된 공산주의자의 실상을 더 중시하였다.

적구생활에 재미를 본 다음부터는 대원들이 모두 나를 따라다니겠다고 하였다.

내가 데리고다니던 부대는 5중대였다. 너무 많이 데리고다니면 먹는 문제도 곤난하고 흔적도 많이 생길수 있으므로 50~60명만 데리고다니였다. 병력이 많이 요구될 때에는 1중대까지 불러오군 하였다. 내가 적구에 나와서 계속 돌아다니는 바람에 2중대를 책임진 최춘국과 3중대의 장룡산이 왕청을 지키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였다. 요영구방위를 담당한것은 4중대였다.

5중대는 왕청치고도 싸움을 제일 잘하는 정예부대였다. 3보 간격으로 걸으라고 하면 3보 간격으로 걷고 숨소리를 내지 말라고 하면 숨소리를 내지 않았다. 큰 전투는 별로 하지 않고 제낄만 한것만 골라 답새겨버리고서는 하루밤사이에 20리, 50리씩 벼락같이 자취를 감추군 하였다.

우리의 적구교란전은 적들로 하여금 유격근거지《토벌》에 전력을 다할수 없게 하였다.

해방후 당선전사업을 맡아보던 일부 사람들은 항일전쟁당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창조한 적후투쟁경험 같은것은 전혀 소개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나라의 전통이나 경험만 선전하였다. 이런 사람들이 부식시킨 사대주의병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해방직후 우리 사람들은 쓰딸린그라드격전이나 꾸르스크땅크전에 대한 말은 많이 하면서도 우리 나라의 항일전쟁사에 소왕청방위전과 같은 가렬한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조차 못하고있었다. 한때는 리수복영웅을 가리켜 《조선의 마뜨로쏘브》라고도 하였다. 조국해방전쟁당시까지만 하여도 우리 인민들은 세계에서 맨 처음으로 화구를 막은 영웅이 쏘련의 마뜨로쏘브라고만 생각하였지 자기 나라의 항일선렬들중에 그보다 먼저 화구를 막은 김진이란 투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고있었다.

우리가 해방직후 혁명전통교양만 잘하여도 후퇴시기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아날수 있었을것이다. 5~6명씩, 15~20명씩 소부대를 조직해가지고 도끼나 하나씩 차고 쌀이나 한두말씩 걷어메고 이산저산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총이나 몇방씩 갈기고 삐라나 몇장씩 붙이고 산에 들어가면 한두달쯤은 얼마든지 견딜수 있었는데 우리가 사전에 이런 교양을 많이 못하다보니 입지 않을 피해도 더 입었다.

내가 적구활동을 제일 많이 하며 돌아다닌 곳은 두만강연안의 농촌부락들이였다. 어느 해인가 기차를 타고 두만강류역을 지나가면서 건너다보니 옛모습과 조금도 다름없는 산과 골짜기들을 알아볼수 있었다.

등하불명이라는 말도 있지만 적의 코밑에 바싹 붙어있는것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 부대는 심지어 도문뒤산에까지 나와있었다. 거기에 와서는 모두 사복을 입고 지냈다. 세 봉우리에 보초를 각각 한명씩 세우고는 수림속에 들어앉아 잠도 자고 책도 보면서 여유작작한 생활을 하였다. 그래도 적들은 자기네 코앞에 유격대가 와있는것을 몰랐다.

우리가 두만강연안의 도문과 량수천자일대에 나와서 적구활동을 한것은 1933년과 1934년 두해 여름이였다. 오의성과의 담판을 치르고 왕청에 돌아와 량수천자부근에서 군중정치공작을 할 때 나는 지휘부가 있을만 한 곳을 물색하기 위하여 도문지방에 대원들도 파견하고 그 고장 토착민들과 담화도 해보았다. 그들은 대체로 송동산, 북고려령, 초모정자 세 지점을 리상적인 후보지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지점들은 지휘부의 안전을 보장하는데서는 좋은 점을 가지고있었지만 우리의 진출목적을 실현하는데서는 적합하지 않은 고장들이였다.

나는 어째서인지 전에 온성으로 드나들 때 평양의 모란봉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꾸만 돌아보던 도문뒤산으로 마음이 끌리였다. 지도를 꺼내놓고보니 우리의 진출목적에도 딱 들어맞는 곳이였다.

골짜기가 여러 갈래이고 숲이 우거져서 여름 한철 초막이나 치고 지내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였다. 이 산주변에는 1930년 이후부터 우리의 조직이 들어가 박힌 개간지도 많았지만 아직 보습을 대보지 못한 처녀지도 많았다. 우리는 그 처녀지들을 다 혁명촌으로 만들 작정이였다.

나는 원래 라자구전투가 끝난 다음 인차 도문뒤산으로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반일부대의 피복과 식량을 해결하느라고 예정되였던 출발날자를 지키지 못하고 소왕청에서 얼마동안 지체하였다. 초복이 다된 때였지만 청산부대 장병들은 헐어빠진 솜동복을 입고있었고 식량이 거덜나서 참새알만 한 감자알을 파먹고있었다.

그바람에 부대주둔지주변의 감자밭들이 결딴났다. 밭주인들은 청산부대를 원망하였다.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니 자연히 상하관계도 나빠지고 부대는 토비화의 길을 걸을수밖에 없었다. 일부는 투항하려는 기미까지 보이였다. 코산부대나 사충항부대의 실태도 이와 비슷하였다. 코산부대가 아직 조선인민혁명군에 편입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우리는 청산부대와 함께 가야허를 치고 해결한 식량과 천들을 반일부대들에 나누어준 다음 조묘태의 적까지 치고나서 도문뒤산으로 향하였다. 라자구에서 창자가 쏟아져나오는 치명상을 당한 후 유격구병원에 호송되여 치료를 받고있던 한흥권중대장이 무슨 오그랑수로 병원을 탈출하였는지 아무도 모르게 슬금슬금 중대를 따라오다가 도문뒤산에 도착하자마자 내앞에 불쑥 나타났다.

한달전에 총상으로 밸까지 나왔던 사람이였는데 수술자리를 보니 어느새 다 아물어있었다. 다만 봉합사를 뽑은 자리에 피기가 좀 남아있을뿐이였다. 실로 꿰맸던 자리가 터질것 같아서 병원으로 되돌아가라고 하자 이 억대우같은 중대장은 울상이 되여 자기를 보내지 말아달라고 애걸하였다. 나는 중대장대리임무를 수행하고있던 왕동무에게 지시하여 도문뒤산에서라도 휴식을 잘 시켜 수술자리가 말썽을 부리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도문은 본래 회막동이라고 부르던 고장이다. 회막동이란 지명은 조선사람들이 옛날 막을 짓고 석회구이를 한 동네라는데로부터 유래된것이였다. 이 주변은 모두 석회석산이였다고 한다.

9.18사변후 만주를 강점한 일제는 길회선철도를 조양천에서 회막동까지 연장하고 그 역이름을 도문이라고 하였다. 역근처의 마을들에 집들을 지어 시가를 만들고 령사관분관, 경찰서, 세관을 설치한 다음 수비대까지 끌어들이여 석회와 함께 살아온 시골을 군경들의 성화에 시달리는 번잡한 소비도시로 만들어버리였다. 이 신시가의 이름은 도문으로 되고 서쪽산밑의 낡은 마을은 구시가로 되였는데 그 시가의 이름은 조선사람들이 부르던 그대로의 회막동이였다. 도문과 남양사이에는 미구에 국경철도가 놓이였다. 그때부터 도문은 만주대륙에서 일본의 리권을 지키는 동쪽관문이 되였다.

대안의 남양도 조선과 만주를 련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1930년대 후반에는 이 지구에 쏘련침략을 위한 첩보모략기구들이 둥지를 틀었다. 이처럼 도문은 군사정치적으로 중시되는 곳이였다.

도문이 우리의 활동거점으로 되고 국내반유격구와의 련계를 지어주는 중요한 통로로 리용된것은 어느모로 보나 유익한 일이였다.

우리는 일찍부터 회막동에 조직을 박았다. 이 조직은 오중성이네 영향하에 있었다. 나는 1930년 9월에 온성으로 넘어갈 때에도 회막동동무들의 도움을 받았고 그 이듬해 5월에 종성으로 건너갈 때에도 그들의 전송을 받았다. 최금숙이 병중에 있는 내 입맛을 돋구려고 사과, 배를 구하러 왔을 때 그를 도와준것도 바로 이 회막동조직이였다.

도문은 온성과 우리를 련결시켜주는 중계소와도 같은 고장으로서 유격대의 후방물자공급기지라고도 할수 있었다.

우리는 도문뒤산에 체류하는 기간 활동의 총적목표를 적들이 시정방침으로 내세운 《비민분리》의 책동을 파탄시키는데 두었다. 《비민분리》란 그네들이 소위 《공비》라고 부르는 혁명군과 인민을 갈라놓는다는 뜻이다. 일제는 이것을 하나의 정책으로 선포하고 사상공작이니, 집단부락정책이니, 십가련좌법이니, 오가작통법이니, 귀순공작이니 하는것들을 연방 고안해내여 군대와 인민을 련결시켜주는 혈맥을 끊어버리려고 발악하였다.

《비민분리》의 폭정밑에서 조직들은 무데기로 파괴되고 민심마저 소란해졌다. 어떤 사람들은 귀순신청서에 도장을 찍기까지 하였다. 이런 현상이 제일 혹심하게 나타난것이 바로 두만강류역의 왕청남단이였다.

우리는 적의 분리주의를 군민단합주의로 타파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하여 군중들속에 들어가 조직공작에 착수하였다. 오중흡이 살던 남양촌조직도 그때 복구해주었다. 대립자에는 최씨들을 핵심으로 하는 조직들을 새로 내왔다. 주변마을들에서 조직공작을 끝낸 다음에는 점차 량수천자방향으로 군중사업무대를 옮겨 림업로동자들과 농민들속에 침투하였다. 언제인가는 한개 소조를 데리고 솔골을 거쳐 훈춘현 밀강의 웅기동이라는 곳까지 가서 두만강건너편에 있는 경원(새별), 훈융쪽의 조직도 수습하였다. 이런 과정에 《비민분리》에 울고있던 인민들을 군민화합으로 웃게 하였다.

도문뒤산으로 들락날락하던 시기에 나는 국내 여러 지역에 꾸려진 기층당조직들과 혁명조직들에 대한 조직지도체계를 정연하게 세우며 당조직건설사업을 국내깊이에로 확대하기 위하여 륙읍일대에 자주 나왔다.

1930년 10월 온성군 두루봉에서 당조직이 결성된 후 두만강연안일대에는 당지도핵심들인 오중화, 김일환, 채수항, 오빈 등과 정치공작원들이였던 리봉수, 안길, 장금진 등에 의하여 수많은 기층당조직들이 꾸려졌다. 회령, 연사, 웅기(선봉), 무산, 경원(새별), 라진, 부령, 청진 신암동 등지에 수많은 기층당조직들이 생겨났다.

1933년 8월에는 경원(새별) 박석골에서 지하당사업과 관련한 강습을 진행하였다. 박석골 숯구이막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밑에서 2일간 진행한 강습에는 북부조선일대를 비롯하여 국내에서 활동하는 정치공작원들과 지하혁명조직책임자들이 참가하였는데 지하당조직건설과 관련된 문제는 내가 강의하고 공청사업과 관련된 문제는 조동욱이, 부녀사업과 관련된 문제는 박현숙이, 아동사업과 관련된 문제는 박길송이 각각 맡아서 강의하였다.

우리의 지도밑에 온성에서 국내당조직 및 혁명조직대표들의 회의가 진행된것도 바로 이무렵이였다. 1934년 2월 지금의 온성군 풍인로동자구에 있는 진명서숙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국내의 넓은 지역에 당조직을 확대하며 당조직지도체계를 세울데 대한 문제를 중심으로 토의하고 지구당위원회와 같은 지역적지도기관을 내오도록 하였다.

이 회의결의에 따라 전장원을 책임자로 하는 온성지구당위원회가 조직되였다. 이 회의는 1930년대 전반기 국내당조직건설사업을 확대하는데서 전환적인 사명을 수행한 중요한 회의였다.

당시 《조선일보》가 《진명서당의 당대회에서 과격한 슬로간 수항목을 결의하여 인쇄배부》했다고 쓴것은 이 회의의 일단을 보여준것이였다.

도문뒤산에서의 적구활동은 흥미있는 일화들도 많이 남기였다.

그 많은 일화들중에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어떤 심보나쁜 지주의 뽕을 빼던 일이다. 그 지주가 살던 마을이름이 무엇이였던지 그것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조선사람동네였던것만은 틀림없다.

어느 날 나는 대원들을 도문뒤산에서 쉬게 하고 사복차림으로 그 지주가 사는 동네에 내려갔다. 그때의 사복차림이란 양장이 아니라 조선바지저고리차림이다. 우리는 배낭속에 늘 사복을 넣어가지고 다니였다. 사복을 입지 않고서는 적구공작을 할수 없었다. 일본말을 잘하는 사람들은 일본옷을 지고다니였다.

그날 나와 동행한 사람은 전령병 리성림과 그밖의 대원 2명이였다.

늦은 오후여서 해질녘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았다. 나는 우리가 손을 한번도 대보지 못한 그 마을 민심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알아보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며칠을 두고 산에만 배겨있자니 한편으로는 갑갑증도 났다. 이 마을 인심이 좋으면 신세도 지고 조직도 박을 작정이였다. 마을에는 일본군경들도 없었다.

나는 이 부락에서 덩지가 제일 크고 번듯하게 생긴 기와집대문앞에 가서 주인을 찾았다. 해가 두발이나 되는 청천백일이였으나 주인들은 웬일인지 안으로 문을 걸어놓고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가 문고리를 잡고 대문을 왈가당왈가당 흔들어대서야 신발을 끌며 게으름스럽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년나이의 사나이가 대문을 열고 언짢은 눈길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가 바로 우리가 뽕을 뺐다는 지주였다.

《주인님, 우리는 지나가던 나그네입니다. 해가 저물어가고 갈 곳도 없어 하루밤 자고가려고 주인을 찾았는데 신세를 좀 질수 없겠습니까?》

나는 례절을 차려 깍듯이 찾아온 사유를 말했다.

주인은 정신빠진 놈들이라고 하면서 다짜고짜 욕지거리부터 앞세웠다. 도덕도 없는 심통이 사나운 지주였다.

《아니, 여기서 한 5리 가면 려관이 있는데 하필이면 왜 려염가에 찾아오는거야. 여기가 뭐 동네집방아간인줄 알아?》

눈알을 굴리며 욕지거리부터 퍼붓는 본새가 이만저만 고약하지 않았다. 상대가 두마디안팎에 우리를 미친놈들이라고 하면서 지나가는 거렁뱅이처럼 박대하기때문에 나는 슬그머니 부아가 동하였다. 그렇지만 꾹 참고 태연하게 또 말을 꺼냈다.

《주인님, 이거 다리도 아프고 발도 부르트고 해서 더 걷지 못하겠는데 어떻게든지 하루밤만 자고가게 해주십시오.》

지주는 입에 거품을 물고 벌컥 짜증을 냈다.

《아니, 려관이 멀지 않다는데 왜 거마리처럼 자꾸 달라붙는거야? 초하루날 장에도 보이지 않던것들이…》

그러자 내뒤에 섰던 전령병이 나를 대신하여 간청하였다.

《주인님, 려관집에 들구싶어도 돈이 없습니다. 마음을 곱게 쓰면 북두칠성도 굽어본다는데 한턱 내는셈치고…》

전령병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지주는 《그럼 우리보구 돈을 내란 말이야, 쥐똥같은 소리!》 하면서 침을 탁 뱉았다. 그리고는 왈카닥 대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혁명을 10년 가까이 해오는 동안 나는 그런 대접을 처음 받아보았다. 우리가 지하활동을 하느라고 많이 다니던 중부만주지방에도 부자들이 많았지만 이 지주와 같이 야박하게 구는 사람들은 없었다.

전령병 리성림은 분을 참지 못하고 풀럭풀럭하였다. 자기네 대장이 사람같지 않은 촌지주한테서 그런 괄시를 당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모양이였다. 그는 분한 나머지 저따위 돼지보다 못한 인간들은 살 자격조차 없으니 쏘아제끼자고 하였다. 쏘아제끼지 못하면 그놈의 귀구멍에 대고 공포라도 한방 놓아 기절해 자빠지게 하자고 하였다.

나도 역시 전령병처럼 분노를 다잡을수 없었다. 이방에서는 동족들끼리 더 친밀해지는 법이다. 고국에서 살 때 개와 고양이처럼 지내던 사람들도 이국에서 만나면 서로 손을 잡고 정을 나누는것이 인간의 본도이다. 하지만 우리를 정신빠진 놈들이라고 모욕한 그 지주한테는 도대체 인정이라는것이 깨알만치도 없었다.

나라가 망했다고 인정마저 더러워질수야 없지 않는가. 같은 불행을 당한 사람들끼리는 서로 동정하는것이 인생리치라고 우리 조상들은 동병상련이라는 성구까지 만들어내였다.

조선민족만큼 정에 잘 웃고 잘 우는 그런 민족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기에 옛사람들도 귀신은 경에 막히고 사람은 인정에 막힌다고 하지 않았던가.

손님을 환대하는것은 조선사람의 장점이다. 쫓지 않고 재워주는것이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우리 인민의 풍속이고 인심이다. 비록 남의 묘를 봐주고 살아가는 산당지기의 가문이였으나 우리 집에서는 손님을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쌀이 없으면 죽솥에 맹물을 한바가지 더 부어서라도 끼니를 마련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의 어머니와 삼촌어머니한테는 거죽에 뜬 멀건 물이 차례지군 하였다.

설사 한끼나 두끼를 굶는 한이 있어도 우리 집안 녀성들은 절대로 시집타발, 신세타발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어린시절부터 내 눈에 새겨진 조선민족의 참모습이고 참표상이였다.

괴춤에 동전 한푼 없는 장돌뱅이도 마음만 먹으면 조선팔도를 무전려행으로 죄다 편력할수 있는것이 저 아득한 삼국시대에서부터 전해내려온 우리 나라의 관례였다. 그래서 단 한번이라도 조선의 려염집에서 손님대접을 받아본 외국인들은 우리 나라를 가리켜 동방례의지국이라고 격찬하였다.

그런데 저 야비한 지주놈의 몸에서는 조선사람의 피가 흐르지 않고있단 말인가. 어쩌면 인간에 대해 저렇게도 랭랭할수 있는가.

그 지주는 우선 도덕적으로 볼 때 무뢰한이였다.

국력이 쇠약한 민족이 나라를 통채로 빼앗기는것은 있을수 있는 일이다. 나라없는 백성은 심지어 말과 글과 성까지도 떼울수 있다. 하지만 나라를 잃었다고 어찌 인정까지 버릴수 있겠는가. 모두가 저 지주처럼 동족도 몰라보는 돼지가 된다면 조선사람은 조선을 다시 찾을수 없는것이다.

다행히도 조선민족중에는 저 지주와 같은 인간들이 소수이다.

나는 여기서 부자들에 대한 견해를 다시한번 재정립하지 않을수 없었다.

1933년 여름에 십리평에 주둔하고있던 구국군의 한 부대가 석현이라는 고장을 치고 경제모연공작을 위해 어떤 중국부자의 안해를 인질로 붙들어온적이 있었다. 전족을 한 녀자였는데 속옷만 입은채로 붙잡혀와서 며칠동안 십리평에 머물러있었다. 구국군들은 그 녀자의 남편에게 통고장을 보내여 아무아무 날까지 돈 얼마를 가지고오면 너희 안해를 돌려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자는 그 돈이면 더 멋있는 녀자를 얻어 장가를 다시 들겠다고 하면서 십리평에 얼굴을 내밀지도 않았다. 구국군에 돈을 내고 그 녀자를 데려간것은 남편이 아니라 친정아버지였다.

심보가 사나운 부자들이란 대체로 이런 사람들이였다.

우리는 잠자리를 잡아보려고 동네를 또 한바퀴 돌았다. 이번에는 기와집이 아니라 초가집에 가서 사정해보자고 하였다. 심보나쁜 지주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래웃방 문을 다 열어놓고 저녁식사를 하고있는 초가집이 보이였다.

나는 그 집 토방돌앞에 서서 지주에게 하던것과 꼭같은 사정을 하였다.

《지나가던 사람인데 날이 저물어 그러니 하루밤 자고갈수 없겠습니까?》

주인은 자리에서 움쭉 일어나 문설주를 짚고 밖을 내다보았다.

《하여튼 들어와 앉으십시오. 뭐 변변치는 않지만 죽이라도 같이 나눕시다. 다른것은 없으니 허물하지 마시오. 어서 들어오십시오. 이거 너무 루추해서 안됐습니다.》

《루추하다니요. 지나가던 사람이 그걸 가리게 됐습니까.》

우리는 주인의 손에 이끌려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초라했지만 주인들의 언행과 마음씨에서는 비단같은 인정이 풍기였다.

주인은 안해를 보고 죽이 한그릇 더 없는가고 물었다. 주인녀자는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 광경을 보니 역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정은 부자의 편이 아니라 평민의 편에 있었다. 둘이나 들어왔는데 저녁을 같이 먹자고 청하니 우리로서는 감격하지 않을수 없었다.

《주인들몫을 우리가 먹으면 댁에서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자기나 하겠습니다.》

나는 밥상앞에 마주앉아도 죽이 목구멍으로 넘어갈것 같지 않아서 자꾸 사양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펄쩍 뛰면서 나를 나무랐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손님으로 오셨으면 손님대접을 받아야지요. …이거 뭐 맛이 없어서 그러시는것 같은데 우리한테는 이것밖에 정말 없습니다. 여보, 거 파나 두어뿌리 뽑아오구려, 장접시두 하나 더 놓구…》

주인녀자는 남편의 분부대로 파와 장을 가져다가 식탁우에 놓았다.

친혈육 못지 않게 우리를 따뜻이 대해주는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보니 어쩐지 눈물이 날것 같기도 하였다. 나는 밥상앞에 마주앉았으나 동네밖에서 경계근무를 서고있는 동무들생각이 나서 수저를 들지 못하였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내 조금 있다가 먹겠으니 먼저 식사를 하십시오. 우리 동무들이 아직 동구밖에 떨어져있는데…》

《오실분이 몇분이나 됩니까?》

주인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나머지죽이라고 해야 한그릇뿐인데 손님이 더 온다면 그것도 야단일수밖에 없었다.

《이제 두 동무가 더 있는데 발이 다 부르트고 걷지 못해서 그럽니다. 그런데 주인님, 이 근처 어디에 려관이 있다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있지요, 한 7리쯤이나 될가요. 7리면 10리나 같은데 어떻게 상한 발을 끌고 10리까지 가겠습니까. 래일 아침에 가실셈치고 다른것은 없지만 죽이라도 같이 나누고 어서 주무십시오. 밖에 있는분들도 데려오시구요.》

나는 집주인에게 지주의 사람됨됨이 어떤가고 물었다.

주인은 지주를 한마디로 린색하고 심술사나운 사람이라고 하였다. 마을사람들과는 등을 돌려대고 살면서도 경찰이나 관리나부랭이들하고는 어지간히 친교가 깊다고 덧붙이였다. 며칠전에 조선에서 친척방문을 왔던 한 청년이 아무런 리유도 없이 경찰서에 끌려가 취조를 받고 반주검이 되여 고향으로 돌아간 일이 있는데 그것도 지주의 작간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날이 저물었다.

나는 전령병에게 오늘 밤은 이 부락에서 지내려고 하니 경계근무를 서고있는 동무들을 시켜 산에 가서 대원들을 다 데려오게 하라고 하였다.

얼마후 한흥권중대장이 부대를 데리고 마을로 내려왔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60~70명이나 한꺼번에 마을로 쓸어들자 변이 났다고 생각한 지주는 우리 동무들앞에 나타나 《어른네들, 수고하십니다!》 하고 아양을 떨었다. 그리고는 유격대원들을 자기 집에 모시겠다고 수선을 피웠다. 사람이 저렇게 두가지 낯가죽을 쓰고 이랬다 저랬다 해서야 불편해서 어떻게 살아갈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였다.

속내를 모르는 한흥권은 퍼그나 감동되여 《대장동지, 저 지주는 소왕청에 있던 장지주나 도문지주처럼 싹싹합니다.》 하고 지주를 칭찬하였다. 장지주란 유격대원호를 잘하다가 쏘베트정부의 추방령을 받고 대두천쪽으로 내려간 사람이였고 도문지주란 반일부대들이 피복문제를 풀지 못해 고생하고있을 때 우리의 요구에 따라 500여벌의 군복을 만들수 있는 천과 솜을 비롯한 여러가지 후방물자들을 해결해준 량심적인 지주였다. 우리는 그 천으로 소왕청지방에 있는 반일부대들에 옷을 다 해입히였다.

도문지주는 친척들을 만나보려고 십리평에 종종 드나들었다. 그런 내막을 어떻게 알아냈던지 우리 동무들이 한번은 경제모연공작을 하려고 지주를 억류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적구활동을 하고 돌아올 때 지도부의 동무들이 방법이 글렀다고 하면서 그를 놓아주었다. 나는 대원들을 시켜 유격구밖으로 달아나는 지주를 다시 데려오게 한 다음 그에게 반일부대의 피복사정을 툭 털어놓고 호소하였다. 지주는 유격대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후 그는 약속을 지켰다.

나는 우리가 방금전에 동네에 내려와서 당한 일을 한흥권에게 대충 말해주었다.

《중대장동무, 그놈의 가살에 속지 마오. 그놈은 지나가는 나그네한테 문도 열어주지 않는 나쁜놈이요.》

한흥권은 내 말을 다 듣고나서 어이가 없는듯 허허 하고 웃었다. 그러더니 주먹을 틀어쥐고 분개해서 말하는것이였다.

《듣고보니 아주 고약한 놈이구만요. 저런 놈은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까지껏, 재판을 열구 쏴제낍시다!》

나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우둘렁거리는 한흥권에게 손을 저어보이였다.

《그만두오. 그까짓 지주나 한명 쏴제껴선 뭘하겠소. 공연히 세상만 소란해지겠는데 …차라리 조선사람의 량심을 지키라고 따끔하게 일러주는게 낫지.》

《그러면 우리가 가서 지주놈의 뽕을 빼구 오겠습니다. 저따위 개벼룩같은 놈을 그냥 놔둘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토비들처럼 행세해서는 안되겠소.》

나는 한흥권이 도수가 넘는 행동을 할것 같아서 미리 침을 놓았다.

한흥권이 자기 집에 나타나자 약삭바른 지주는 턱밑에 다가들어 대장이 누구인가고 물었다. 대장과 그밖의 지휘관 몇사람만 치르고 나머지는 어차피 다른 집들에 분숙을 할터이니 자기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속심이였다. 박정한 인간이니 계산도 매우 빨랐다.

한흥권은 자기를 대장이라고 소개한 다음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

《이 집이 괜찮게 사는것 같습니다. 한둬달 퍼먹고가두 꿈쩍 안할것 같은데요.》

《거 뭐 두달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며칠은 괜찮을것 같습니다.》

지주는 유격대가 자기 집에 정말 두달쯤 있을것만 같아서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리였다.

지주가 뭐라건말건 한흥권은 그냥 시치미를 뻑 따고 상대방이 경풍을 일으킬 아찔아찔한 소리만 하였다.

《주인님, 거 우리 부하들이 몇달째 고기를 입에 넣어보지 못했는데 집에 돼지가 몇마리나 있습니까. 다른 집들은 몰라두 이 집에서만은 쌀을 한 100가마니쯤 쌓아놓구 먹겠지요?》

《원, 100가마니라니요. 어림두 없습니다. 다른 집들두 죽을 쒀먹으면서 궁상을 떨지만 쌀은 다 있습니다.》

《쌀이 있거나말거나 당신이 한턱 내야겠소. 당신은 부자인데 그쯤한걸 가지구 뭘 부들부들 떨면서 그러오. 당신두 조선사람의 량심을 가졌으면 나라를 독립시키는데 한몫해야 할게 아니요. 그래 당신과 같은 사람의 신세를 지지 않구 농량이 없어 겔겔하는 가난뱅이들의 쌀독을 퍼먹으라는거요? 농량마저 없으면 농사를 어떻게 짓는단 말이요?》

지주는 한흥권의 엄포에 기가 눌려서 돼지도 잡고 쌀도 퍼주었다. 다른 집들에 숙소를 정한 대원들도 그 집 식량은 다치지 않고 지주의 쌀을 받아다가 밥을 지어먹었다. 그 사람이 우리를 사람답게 대해주었더라면 이런 봉변을 당하지 않았을것이다.

한흥권은 이렇게 지주를 뽕빼놓은 다음 나의 잠자리를 생각하여 그 집에서 돗자리와 이불까지 가지고 돌아왔다. 원래 그는 이런 희극을 잘 노는 걸작이였다.

그날 밤 우리는 보리죽을 권하던 그 순박한 농민의 집에서 한흥권이 가져온 지주집 쌀로 밥을 지어먹었다.

주인은 겁이 나서 《이걸 이렇게 해서 일없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주인을 안심시키였다.

《주인님, 걱정마십시오. 당신들한테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당신네야 밥가마를 빌려준것밖에 없는데 뭘 그러십니까. 후날 지주놈이 걸고들면 유격대가 한 일이니 모르겠다고 하십시오.》

《유격대라면 우리두 마음을 놓겠습니다. 이 미물들이 유격대어른들두 몰라보았습니다그려.》

주인내외는 정말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수 없었다. 그저 조선사람의 순박한 례절로서 죽이면 죽, 된장이면 된장을 있는것만치 같이 먹자고 권하였던것이다. 그러나 지주에게는 이런 례절도 없었다. 아마 일본순사들이 대문앞에 나타났더라면 방석우에 모시고 알랑거렸을것이다.

부자와 평민의 차이란 이런것이였다. 부자들이라고 하여 인정이 있고 애국심이 있는 사람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였다. 장울화의 아버지 장만정은 대지주였지만 인망이 높고 애국심이 강한 사람이였다. 내가 백과부와 같은 부자를 훌륭한 녀자라고 평가하는 리유도 그가 민족의 계몽과 발전을 위해서 금전을 아끼지 않은 인덕이 높은 애국자라는데 있다. 그래서 후세사람들도 그의 이름을 백선행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자들은 우리가 만난 그 지주처럼 린색하고 몰인정하였다.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말은 물론 세상리치에 닿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경우에나 다 들어맞는 말이라고 할수 없다. 우리에게 보리죽을 권하던 그 농민이 쌀독이 높아서 그런 인정을 베풀었겠는가. 말이 났으니 말이지 그 집 쌀독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풋바심한 보리가 한자루정도 웃목에 놓여있었을뿐이였다.

돈주머니가 크고 재물이 많아도 인덕이 없으면 세상의 버림을 받는다. 오막살이에서 살아도 인덕이 높으면 많은 이웃을 가지게 되고 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도덕적인 부자가 된다. 인간의 우렬을 가르는 척도를 도덕이라고 할 때 우리를 대문앞에서 쫓아버린 그 지주는 도덕적으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가련한 가난뱅이라고 할수 있다.

참다운 인정은 고대광실이 아니라 평민들이 사는 오두막에 있었다.

리봉수부부는 전에 마창에서 일할 때 발진티브스에 걸린 일이 있다. 리봉수의 부인 안순화는 자기 남편이 원장으로 사업하는 병원에 있었는데 굶어죽은 아이를 파묻으려고 밖으로 기여나가 가둑나무잎을 덮어주었다.

리봉수는 자기도 아들처럼 인차 죽게 될것이라는 예감이 드는 순간 혁명동지들이 며칠전에 가져다준 새옷을 벗어놓고 다음과 같은 유서를 써서 그 우에 포개놓았다.

《이 옷은 얼마 입지 않은것이니 유서를 발견하는 동지는 나를 대신하여 입으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 지주와는 대비조차 할수 없는 혁명가들의 인정세계였다.

리봉수는 기적적으로 살아서 혁명을 계속하였다. 그가 남긴 《유서》는 그의 인간성을 보여주는 증거문건으로 남아 사람들을 감동시키였다. 이것은 공산주의자들만이 창조할수 있는 고상하고 뜨거운 인정세계였다.

도문뒤산에 있다가 유격구로 돌아간 다음 우리는 군대들을 모여놓고 그 마을에서 당한 일을 그대로 이야기해주었다. 이걸 보라. 계급적본성이다. 어려운 사람은 죽이라도 같이 먹자고 하는데 잘 사는 지주는 죽은 고사하고 문전에서 쫓아버린다. 나쁜 놈이 아닌가. 이런 놈들의 꼴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착취사회를 청산해야 한다.

그 이야기가 훌륭한 계급교양자료로 되였다.

그다음부터 잘 사는 지주와 가난한 농사군에 대한 이야기는 두만강연안 농촌부락들에서 하나의 화제거리가 되여 돌아갔다. 그 소문을 들은 인민들은 한결같이 지주를 몹쓸 놈이라고 욕하였고 농사군을 인정머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우리 사복대들이 부락근처에 가면 청년들이 찾아와서 누구네 집은 잘 살고 누구네 집에는 민회소가 있다고 다 귀띔해주었다.

그 당시 농촌에서는 민회소들을 가져다가 길렀다. 민회소라는것은 일본이 만주를 강점한 후 반동단체인 민회들에서 농민들에게 나누어준 소이다. 농민의 소유가 되는것은 아니고 다 기르면 바치게 되여있는 그런 소였다. 이것도 로동력을 착취하는 하나의 공간이였다. 민회소들은 뿔에 도장이 박혀있었다.

청년들이 아무 집에 민회소가 있다고 하는것은 잡아먹어도 좋다는 소리였다. 유격대원들은 인민들이 대주는대로 민회소만 골라가며 잡아먹었다. 그러면 일본사람들이 이 동네에는 나쁜 놈들뿐이다, 어떻게 공산군들이 민회소가 있는 집들을 다 조사하고있는가, 동네사람들이 대준것이 틀림없다고 막 야단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농민들은 《우리가 알게 뭡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사람들한테 문서가 다 있습디다. 문서를 보고 불러내는데 방법이 있습니까?》 하고 발뺌을 하였다.

나는 오랜 체험을 통하여 부자들일수록 미덕이 없는 매정한 인간들이라는것을 뼈에 사무치게 느끼였다. 선과 도덕과 등을 진 부 그자체는 미덕을 낳는 샘이 아니라 미덕을 매장하는 함정이였다. 두만강가의 그 지주가 내 가슴에 단단히 못을 박아놓았다. 그 사람때문에 그 마을에 대한 인상이 퍼그나 흐려졌다.

나는 그 사건까지 겪고나서 장차 나라가 독립되면 지주, 자본가들이 거들먹거리는 패륜패덕의 낡은 사회를 청산해버리고 만사람이 빈부의 차이가 없이 한가정처럼 화목하게 살아가는 아름답고 건전한 사회를 세우려고 더 굳게 결심하였다.

우리는 지금 모든 근로자들을 부자로 만들기 위해 힘쓰고있다. 남의 피땀으로 호의호식하는 그런 부자가 아니라 자기의 로동으로 사회의 부를 끊임없이 창조해나가는 성실하고 근면하고 물질적으로 풍족하면서도 인덕이 후한 도덕적인 부자들을 만들자는것이다. 금전이 만능의 수단으로 되여있는 자본사회를 우리는 용납할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꼭같은 물질과 도덕의 부를 향유하는 시대가 도래할 때 인류를 더럽히는 사회악은 깨끗이 근절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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