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혁명의 기치를 끝까지 고수하자 |
9. 혁명의 뿌리를 가꾸며 혁명이란 투쟁 하나만을 의미하는것이 아닙니다. 혁명에는 투쟁도 있고 생활도 있습니다. 투쟁과 생활을 하나로 융합시키고 투쟁속에서 아름다운 생활을 창조하여 사회적진보와 번영을 이룩해나가는것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지향하고있는 혁명입니다. 항일혁명투사들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간난신고속에서도 공산주의자들만이 설계할수 있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생활을 창조하였으며 가는 곳마다에서 도덕의리의 리상향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들은 투쟁속에서 사랑도 하고 가정도 이루었습니다. 투사들의 생활에는 시도 있고 노래도 있고 눈물도 있고 웃음도 있었습니다. 우리 혁명은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의미와 내용을 가지고 더욱 풍만 한 발전의 길을 헤쳐나갔습니다. 바야흐로 항일혁명의 최후승리를 향하여 줄달음치던 1940년대에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안겨준것은 혁명의 2세들이 태여난 사실이였습니다. 나는 나는 어린시절에 집안어른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10여명이나 되는 대가정의 모든 식솔들이 한사람처럼 나를 가문의 기둥이라고 하면서 극진하게 돌보아주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의 사랑도 이만저만이 아니였습니다.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는 집안자손이니 더 살뜰하게 대해주었을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나의 동무들은 백두산에서 또 한사람의 장군감이 태여났다고 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김책은 유년시절의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 혁명의 새로운 세대가 항일의 불길속에서 태여나 백두산의 이깔처럼 싱싱하게 자라나고있는 모습을 보면서 조선혁명의 양양한 전도를 확신하게 되였으며 천백배의 힘과 용기와 투지를 가다듬고 조국해방의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더 억세게 싸워나가게 되였습니다. 전에도 말한것이지만 나는 한평생 나는 열다섯살때 어머니의 슬하를 떠난 이후로는 줄곧 인민들과 나도 힘이 진하거나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면 먼저 이제 동무들한테 원동의 훈련기지에 가있을 때 있었던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국제련합군을 조직하고 우리가 북야영에 집결했던 그해 겨울 만주와 원동 지방에는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눈이 어찌나 많이 내렸던지 산짐승들까지 먹을것을 찾아 민가에 내려오는 판이였습니다. 무릎을 치는 눈때문에 거리로는 얼마동안 자동차도 다니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때에 소부대공작을 나갔던 김일이 무거운 쌀자루를 메고 기지에 돌아와 김일이 나를 위해 쌀자루를 메고 다닌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자기는 만날 통강냉이만 먹으면서도 나한테만은 어떻게 하나 쌀밥을 마련해주려고 항상 마음을 썼습니다. 류경수도 후방부에서 쌀을 조금씩 공급해주면 나와 전우들사이에 오고간 혁명적 훈련기지에 있을 때도 형편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는 쏘련사람들도 전쟁을 치르느라고 배불리 먹지 못하였습니다. 적게 먹고 적게 자고 수수하게 입고다니자는것이 그들의 구호였습니다. 그러니 강보도 포단도 모자도 마련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녀대원들이 자투리천들을 모아다가 그에게 쪽무이포단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나의 전우들은 자기 사령관의 아들이 쪽무이포단을 덮고 지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것을 몹시 가슴아프게 여기였습니다. 그때의 일이 얼마나 가슴에 맺혔던지 해방후 림춘추는 중국 동북지방에 가서 사업하다가 휴가차로 조국에 나올 때 모포 500장을 사다가 나와 생활형편이 몹시 어려운 때였지만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온갖 지성을 다하여 녀대원들이 특히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때 백두밀영과 달리 원동에 있을 때는 우리 집과 부대가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때문에 훈련여가나 휴식일이 되면 많은 대원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 빨찌산의 아들로 태여나 포연에 절은 옷을 입고 군대밥을 먹으며 돌격구령소리와 함께 성장한 그의 인생은 첫시작부터가 남다른것이였습니다. 백두밀영도 그렇지만 원동의 훈련기지라고 해야 영양제가 될만 한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만사람이 다 허리띠를 조이며 어렵게 사는 때여서 돕고싶어도 마음뿐이지 사실 별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런 때에 림춘추랑 많은 동무들이 자기 몫으로 차례지는 빵을 조금씩 아껴두었다가 언제인가 림춘추가 무전기를 메고 만주에 소부대공작을 나간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령부와 무전련계를 가지면서 몇달동안 정치공작을 하였습니다. 그가 그때 임무를 아주 잘 수행하였는데 기지로 들어올 때에는 적구에서 닭알까지 수십알 구해가지고 왔습니다. 소부대공작지에서 우리 훈련기지라는데가 거리가 먼데다가 거기로 오가는 길이 평탄한 대통로도 아니고 총검이 숲을 이룬 사지판이였습니다. 그러니 제 한몸 건사도 하기 어려운 사지판으로 등에 무전기를 짊어진 사람이 닭알짐까지 들고오자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림춘추가 그 닭알보따리를 들고 우리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사실 림춘추와 림춘추는 병고로 시달리는 인민들에게 의료상방조를 많이 주었습니다. 림춘추는 국제련합군시절만이 아니라 한생을 나와 나라가 해방되자 림춘추는 그는 후대들에게 림춘추는 손에 무장을 잡고 싸우면서 지식으로써 우리 사업을 보좌한 대표적인 인테리입니다. 그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항일무장투쟁초기부터 력사기록과 저술활동을 하였습니다. 림춘추가 력사가로서의 첫걸음을 뗀것은 연길현 조양천에서 당 및 공청간부들과 내가 한 담화를 기록으로 남긴 때부터였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조선인민혁명군 종군력사가로서 남호두회의와 남패자회의, 소할바령회의를 비롯한 주요회의들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충실하게 회의기록을 하였습니다. 림춘추는 국제당이 관계하는 출판물들에도 여러건의 글을 써보냈습니다. 어느해였던지 잡지 《태평양》이 그 잡지 특파원과 림춘추의 회견기를 실은 일이 있습니다. 나는 그 회견기를 보고 림춘추가 특파원에게 우리 부대 자랑을 많이 했다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전투전에 잘 세운 계획과 오묘한 전술과 신속정확성, 용감성으로 하여 실패를 모른다고 하였으며 우리 대오가 독자성이 강하고 문화적이며 락천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잡지특파원은 그 회견기에서 림춘추가 조선인민혁명군의 전과에 대한 글과 아동단원 김금순의 영웅적최후에 대한 글을 써보낸 사실까지도 다 서술하고있었습니다. 림춘추는 늘 전우들에게 대내출판물을 운영하는것도 중요하고 국제당에 보내는 보고서나 문건을 작성하는것도 좋고 혁명군의 전과자료를 종합하는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것은 조선공산주의운동과 우리 나라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김사령의 투쟁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해두는것이다, 내 비록 필치가 무디고 지성도 천박하지만 우리 빨찌산대원들중에 무장을 가지고 혁명위업에 이바지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림춘추와 같이 굳은 신념을 가지고 빨찌산의 력사를 자발적으로 수록해서 후세에 남긴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림춘추는 당사업을 많이 한 로숙한 정치일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치일군으로서의 림춘추보다 문필가, 력사가로서의 림춘추를 더 내세우게 되는것은 그가 우리의 혁명력사를 정립하는데서 해놓은 일이 그 무엇으로써도 대신할수 없는 커다란 공헌으로 되기때문입니다. 림춘추는 풍부한 사료를 가지고 우리의 혁명력사를 종합체계화하고 깊이있게 고증한 사람입니다. 그가 항일무장투쟁에 대하여 이렇게 고증하게 된것은 그때 일기를 계속 썼기때문입니다. 림춘추와 같은 문필가, 력사가가 항일무장투쟁시기의 자료들을 정리해두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활동력사중에서 많은것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파묻히고 말았을것입니다. 림춘추는 우리의 혁명력사를 정립하는데서뿐아니라 그것을 소개선전하는데서도 많은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해방직후에 평남도당에서 당사업을 하던 그는 조기천, 정관철을 비롯한 여러 문화인들에게 보천보전투를 비롯한 우리의 항일빨찌산투쟁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었습니다. 림춘추는 혁명전통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도서들과 수많은 회상실기들을 집필완성하여 우리 당 력사문헌고를 풍부히 하는데 공헌하였습니다. 그는 수령의 혁명사상과 혁명력사, 우리 당의 혁명전통을 옹호하고 빛내이는 일이라면 그 어떤 장애도 박차고 나갔습니다. 림춘추는 내가 발표한 론문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임무》를 가지고 국제련합군시절에 정치강의에 출연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른 나라의 일부 지휘관들이 우리의 론문을 강의안에 포함시키겠는가고 하면서 좀 고려해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림춘추는 우리는 벌써 오래전부터 림춘추는 내 건강을 위해서도 왼심을 많이 쓴 사람입니다. 그는 련대당서기를 할 때 회의에서 토의된 문제라고 하면서 나에게 통지해준 일이 있습니다. 무슨 문제인가 하면 내가 배낭을 절대로 메고 다니지 않도록 해야겠다는것이였습니다. 나는 림춘추를 불러 동무는 혁명년조가 오랜 사람인데 어떻게 회의에서 그런 문제까지 다 토의하는가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당원들의 요구입니다, 사령관이 배낭을 지고 다니는걸 보면 사람들이 우리를 손가락질합니다, 대중의 의사이니 받아주셔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림춘추는 나에게 헌신적이였던것처럼 그러면 어떻게 되여 림춘추가 그처럼 자기 수령과 령도자를 열렬히 경모하고 그 령도에 충실한 혁명가로 되였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김혁, 차광수나 김책과 마찬가지로 종파의 해독성을 잘 알고 실지체험을 통하여 수령이 귀중함을 그 누구보다도 뼈에 사무치게 통감한 사람이였기때문입니다. 림춘추가 외국에서 대사로 있다가 원칙을 지켜 그 나라 당국자들과 되게 다투고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 당안에 있던 종파사대주의자들은 외교관례에 있을수 없는 일을 했다면서 조직문제까지 보아야 한다고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림춘추가 저술활동을 하면서 그때부터 림춘추는 사업과 생활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림춘추가 저술활동에 전념하던 1960년대 후반기 국제공산주의운동무대에서는 혁명위업계승문제, 특히 후계자문제가 론의의 초점으로, 시대적요구로 나서고있었습니다. 후계자를 옳바로 선정하는것은 혁명과 건설, 나라와 인민의 장래운명을 결정하는 근본문제입니다. 후계자를 잘못 내세운탓으로 혁명도 망치고 나라도 망치는 실례가 얼마나 많습니까. 10월혁명후 쏘련인민이 짧은 기간에 자기 나라를 세계적인 강국으로 만들수 있었던 기본요인은 레닌이 후계자를 잘 골랐기때문입니다. 레닌의 충실한 전우이며 제자인 쓰딸린은 한평생 자기 수령의 위업에 충실하였습니다. 레닌이 서거한 다음 쓰딸린은 그의 령구앞에서 6개 조항의 맹세를 하였습니다. 그후 그는 혁명과 건설을 령도하는 과정에 그 결의들을 다 실천에 옮기였습니다. 쓰딸린은 독일군대가 모스크바 코앞에까지 들어왔을 때에도 다른 정치국위원들과 간부들은 소개지로 보내면서도 자기자신은 그냥 크레믈리에 틀고앉아 전선지휘를 하였습니다. 쓰딸린이 살아있을 때는 쏘련에서 만사가 다 잘돼나갔습니다. 그런데 흐루쑈브가 집권한 다음부터 일이 비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쏘련당안에서 현대수정주의가 대두하고 쏘련사람들이 사상적으로 병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흐루쑈브는 자기를 길러준 수령의 은덕도 다 잊어버리고 개인미신에다 걸면서 쓰딸린을 헐뜯었으며 쓰딸린에게 충실한 로혁명가들도 모조리 정치국에서 쫓아내고 당대렬에서까지 추방해버리였습니다. 그후 언제인가 림춘추는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레닌묘를 참관하다가 우연히 실각한 몰로또브를 만난 일이 있습니다. 몰로또브는 그때 림춘추에게 당신들은 쏘련당의 전례를 생각해서라도 절대로 수정주의를 하지 말고 자기 수령의 사상과 업적을 충실하게 계승해나가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림춘추는 그때 후계자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면 당도 망치고 혁명도 망친다는것을 똑똑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력사의 쓰라린 교훈이 보여주는바와 같이 후계자의 표징에서 기본을 이루는것은 수령과 수령의 위업에 대한 충실성이며 도덕의리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수령에 대한 충실성은 도덕의리를 떠나서 존재할수 없습니다. 수령에 대한 충실성과 도덕의리, 이것은 후계자가 갖추고있어야 할 첫째가는 표징입니다. 그리고 높은 자질과 령도풍모를 지닌 실력가만이 수령이 개척한 혁명위업을 수령의 사상과 의도대로 빛내여나갈수 있습니다. 우리 인민은 수령의 사상체계와 령도체계를 확립하는데서 우리 인민은 오래전부터 그를 존경하고 받들어왔습니다. 항일혁명투사들이 김일, 최현, 오진우와 함께 림춘추는 항일혁명투사들이 김일이 늘 나와 해방후 그가 부관으로 일할 때 아침 일찍 일어나서는 경비상태를 돌아보고 우리 집 부엌에서 내가 현지지도를 나갈 때마다 리을설은 나는 지금도 전쟁때 신의주에서 그때 리을설이 어린 시절의 1953년 여름에 내가 우리 나라 당 및 정부대표단을 이끌고 쏘련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우리가 방문일정을 마치고 모스크바를 떠날 때 쏘련측에서는 환송연회를 차리였는데 그 연회상에 오른 수박맛이 특이하였습니다. 연회가 끝난 다음 숙소에 가니 지함을 포장하고있던 리을설이 나를 보자 몹시 당황해하였습니다. 무슨 지함인가고 물었더니 그는 좀 주저하는 눈치를 보이다가 자제분들생각이 나서 수박 한개를 마련했습니다라고 하는것이였습니다. 지함안의 수박은 물동이만큼이나 큰것이였습니다. 그날 리을설은 어려서 부모의 슬하를 떠나 한생을 내곁에서 살아왔습니다. 수십년동안 경위대원으로 복무하면서 제국주의자들과도 싸우고 대국주의자들과도 싸우고 반동들과도 싸우고 종파들과도 싸우다나니 쓴맛, 단맛도 다 보고 산전수전도 다 겪었습니다. 그 과정에 그는 무서운 배짱군으로 자라났습니다. 하바롭스크회의가 끝난 다음 나는 인차 박영순과 리을설을 워로쉴로브에 있는 무전강습소에 보내면서 강습을 마치고 곧추 부대에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소부대를 데리고 백두산동북부와 국내에서 활동하는 동안 리을설은 무전강습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올 차비를 하였습니다. 리을설이 무전강습총화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날 쏘련군대의 한 고위간부가 국제당의 요구라고 하면서 그더러 조선으로 나갈 차비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리을설은 조선으로 나가라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쏘련의 군사일군은 당신이 믿음직해서 그런다, 우리가 전략상으로 중시하는 성진이 당신의 고향이니 거기에 가 배겨있으면서 적들의 움직임을 무전으로 우리에게 보고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리을설은 고향에 가서 공작하고싶지만 나는 우리 사령관 그 쏘련사람은 다음날에도 리을설을 설복하였습니다. 리을설은 그때 나는 사령관이 준 명령을 집행하기 전에는 어데도 갈수 없는 몸이다, 지난날 무전기술을 소유한 통신병들이 없기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아마 당신은 모를것이다, 그런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사령관 그때는 원동에 림시로 들어가있었고 또 아직은 국제련합군이 조직되지 않은 때여서 통합된 지휘체계 같은것도 없었기때문에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이 각기 자기의 독자적인 지휘체계와 질서대로 생활하고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쏘련군사일군이 우리와의 사전협의도 없이 국제당을 걸고 무전강습소를 졸업하고 부대에 돌아가게 되여있는 리을설을 다른 일에 빼돌리려고 한것은 무리한 일이였습니다. 리을설이 사령관이 준 명령을 집행하기 전에는 그 어떤 임무도 받아들일수 없다고 한것은 우리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의 표현이였습니다. 리을설은 소년중대시절부터 현재까지 나를 위한 호위사업에 한생을 바치면서도 나의 뜻을 어기거나 임무수행에 태공한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자나깨나 오직 자기 수령만을 생각하고 수령의 건강과 신변안전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쳐왔습니다. 내가 1939년에 올기강에서 낚시질을 할 때에도 내뒤에서 기관총을 걸어놓고 호위사업을 한 사람은 경위대원 리을설이였습니다. 리을설은 해방후에도 나를 잘 호위하였습니다. 전쟁때 최고사령부주변에 반혁명분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조국의 운명과 직결된 극비자료들이 박헌영과 리승엽을 통해 계속 미국사람들에게로 날아갔습니다. 1952년 여름에 리승엽은 졸개들을 시켜 무전련락으로 최고사령부가 자리잡고있던 건지리골안에 미국비행기들을 수십대나 불러들였습니다. 그 비행기들이 최고사령부주변을 발칵 뒤집어놓았습니다. 최고사령부건물곁에는 큰 시한탄까지 떨구고 달아났습니다. 내가 있던 집에서 그 시한탄까지의 거리는 매우 가까왔습니다. 그때 리을설이 비상회의를 열고 부관들과 호위성원들에게 결사전을 호소한 다음 당원증을 바치고 목도로 그 시한탄을 메다가 골짜기에 내던졌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리을설은 최고사령부주변에 잠복해있던 암해분자들과 반동분자들을 모두 잡아냈습니다. 리을설은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과의 투쟁도 아주 잘하였습니다. 내가 1956년에 쏘련을 비롯한 구라파사회주의나라들을 방문하고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그 당시 부관장으로 사업하던 리을설이 하루는 지금 뒤에서 최창익이랑, 박창옥이랑 노는 꼴이 심상치 않은데 각별히 조심해야겠다고 하면서 그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까밝혀놓는것이였습니다. 남일이도 나에게 전화로 최창익과 박창옥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것을 통보해왔습니다. 리을설은 김창봉의 군벌관료주의와도 정면으로 맞서 잘 싸웠습니다. 리을설은 나를 위해 일생을 바쳐온것처럼 리을설과 박영순은 남야영에 돌아와 많은 무전수들을 키워냈습니다. 리을설은 그후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결전이 벌어지게 될 중요한 작전지점들과 일본군대의 기본력량이 배치되여있는 전략적요충지들에서 소부대공작을 여러차례 하였습니다. 그는 소부대에 망라되여 무전기를 메고 왕청현 로흑산일대에 나가 정찰활동을 한적도 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적들이 로흑산일대에 큰 비행장을 건설하고 수백대의 비행기들과 수백문의 대포, 수백대의 자동차들을 집결시키고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확인할 길이 없어 작전준비에서 큰 지장을 받고있었습니다. 쏘련사람들도 그 정보의 정확성여부를 검증하려고 안절부절 못하고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부대를 로흑산에 보냈습니다. 소부대성원들은 비행장안에까지 대담하게 뚫고들어가 거기에 있는 새 비행기와 새 자동차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신형포들이 전부 나무로 만든 가짜라는것을 알아내게 되였습니다. 리을설은 정찰을 끝내자마자 나에게 무전으로 소부대활동결과를 보고하였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령도의 계승문제를 훌륭히 해결했다고 하는데 나는 항일혁명투사들이 령도의 계승문제를 해결하는데서 많은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싶습니다. 항일혁명투사들은 어린 시절의 항일혁명투사들은 그래서 나는 지금도 항일혁명투사들을 만나면 우리가 좀더 오래 살아서 수령의 위업을 계승완성해나가는데서 또한 중요한것은 후계자의 령도를 충실히 받들어갈수 있는 핵심의 육성, 후비대의 육성입니다. 핵심을 잘 꾸리지 않거나 후비대를 잘 육성하지 않으면 후계자의 령도체계도 옳바로 세울수 없고 후계자의 로선과 방침도 관철해갈수 없습니다. 우리는 해방후 백두산에서 싸워온 핵심들을 가지고 혁명을 발전시켰습니다. 지금 우리는 당원들과 군인들과 청년들로 이루어진 수십수백만명의 핵심부대를 가지고있습니다. 령도자가 있고 핵심이 있으면 두려울것이 없습니다. 군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아도 천험의 요새나 금성탕지라고 할만 한 곳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의 소재지로서는 명당자리였습니다. 정일봉의 이전 이름은 장수봉입니다. 우리 혁명의 대가 굳건한것은 빨찌산의 아들로 태여나 군대와 인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신임속에서 수령의 후계자가 되고 민족의 령도자가 된 |